‘그 후의 이야기는, 그랑에 따르면, 뻔했다. 누구나 마찬가지. 결혼을 하고, 좀 더 사랑을 이어나가고, 일을 한다. 그러다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
일과 사랑은 본성이 다르다. 일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의 뜻을 따라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으로 돈을 받아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를 기다려준다. 우리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 자신보다 우리를 먼저 헤아려 주고 배려해 준다. 그래서 일을 하다 보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게 된다. 기다려 달라고, 내 입장과 심정을 좀 헤아려 달라고. 일이 사랑의 조건이라도 된다는 듯,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기실 일은 생활의 조건에 불과하다.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같이 생활할 수 있고 그런 생활이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듯, 누구에게나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잘 번다는 게 좋은 배우자나 부모가 되는 것과 무관함을 나이를 먹을수록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그 보상인 돈을 생활의 조건이 아닌 사랑의 조건이라고 착각하는 건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하는 것을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들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모에게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값비싼 장난감이나 성대한 만찬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줬던 시간들, 우리를 기꺼이 기다려주고, 늘 자신들보다 먼저 우리를 헤아리고 배려해줬던 무수한 날들이다. 사랑의 조건은 물리적 시간이다. 시간만이 사랑을 한낱 말이 아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실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에는 사실 낭만이 없다. 아무도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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