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만의 비상계엄 사태는 오래된 문화를 소환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서툰 손글씨의 종이 대자보가 나붙었다. 디지털 세계에 갇혀 지내던 학생들은 광장에 나와 난생처음 대자보를 쓰고 읽으며 해방감과 유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 하나가 호외(號外) 신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토요일은 신문사들이 쉬는 휴일이었으나 일제히 호외를 발행해 헌정 사상 3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전했다.
▷호외는 정규 발행일을 기다리기엔 긴급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호수 없이 발행하는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3만2120호와 3만2121호 사이 ‘尹대통령 탄핵, 직무정지’라는 큰 제목의 4개면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를 받아 든 중장년층은 “오랜만에 보는 호외”라며 반가워했고, 청년들은 드라마에서 봤던 신문 배달 소년처럼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기해했다. 집회 현장의 시민들은 ‘역사 굿즈(기념품)’ 호외를 들고 인증샷을 찍었고, 소셜미디어에는 “탄핵 호외 구하고 싶다”거나 “호외 2부 있어서 1부 나눔한다”는 게시글도 여럿 올라왔다.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호외는 독립신문 1898년 2월 19일자다. 4일 전 미 해군 함정이 쿠바 아바나만에서 폭침당했다며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사건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외신을 호외로 보도할 정도로 안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호외 발행이 잦아졌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엔 두 신문이 한 달 동안 약 50회의 호외를 내며 전황 속보를 전했다. TV가 보급되기 전에는 대형 물난리가 나면 ‘화보 호외’를 찍기도 했다.
▷호외는 환희와 성취, 충격과 슬픔이 가득한 현대사의 기록이다. 4·19 혁명, 5·16 쿠데타, 박정희 대통령 피살, 6·29 선언, 월드컵 4강 진출, 남북 판문점 선언 등 제목만 일별해도 격동의 현대사임을 실감할 수 있다. 드물지만 오보를 낼 때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호외를 내고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 소식을 전했는데 오보였다. 1986년엔 한 신문사가 ‘김일성 총맞아 피살’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발행했으나 바로 다음 날 김일성이 평양 공항에 나타나면서 오보로 판명 났다.
▷호외 전성시대도 저물었다. 이제 속보는 방송과 인터넷, 신문은 심층 보도와 의제 설정을 담당한다. 그래도 호외 문화가 남아 있는 이유는 중대한 사건일수록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 정돈된 정보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온갖 설이 난무하는 디지털 시대에 삼삼오오 모여 호외를 펼쳐 든 건 ‘역사의 초고’를 공유하며 역사의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종의 의례였을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