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2007년 작 ‘식코’에는 전기톱 사고로 왼쪽 손가락 2개가 잘린 남성이 나온다. 보험이 없는 그는 병원에서 “중지와 약지의 접합 비용이 각각 6만 달러(약 8400만 원), 1만2000달러(약 1680만 원)”라는 말을 듣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나마 비용이 덜 드는 약지만 붙이기로 한다. 그의 중지는 새 모이로 버려진다.
민간 건강보험에 의존하는 미국 의료체계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이 영화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4일 뉴욕 한복판에서 대형 보험사인 유나이티드헬스케어의 브라이언 톰프슨 최고경영자(CEO)가 루이지 맨지오니(26)의 총격으로 숨졌다. 만성 척추 통증에 시달렸지만 차도를 보지 못한 맨지오니는 범행 이유를 보험금 지급을 꺼리며 환자의 치료를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보험업계의 관행에서 찾았다.
맨지오니가(家)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일대에서 골프장 등을 운영한다. 부유층 자제가 ‘돈’ 때문에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점은 보험업계 전반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불만과 불신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미국은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국가 주도의 공공보험이 없다. 지난해 기준 전 인구의 65.4%(약 2억1582만 명)가 민간보험에 가입했다. 50개 주의 연방 체제, 개인 자유와 선택권을 중시하는 풍조, 인종·계층·이민 역사 등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공공보험에 대한 인식 등이 공공보험 정착을 어렵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민간보험은 대부분 기업(고용주)을 통한 직장보험이다.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나 대부분 해당 보험사와 계약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혜택을 얻는 구조다. 보험사의 권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오바마케어, 즉 ‘환자 보호 및 보험료 적정 부담법(PPACA)’의 2010년 등장 후 보험사가 치료비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본다. 지급 시기를 늦추거나 지급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경향 역시 짙어졌다. 오바마케어의 목표는 전 미국인의 보험 가입이다. 민간 혹은 공공보험 중 반드시 하나는 가입해야 한다. 또 직장인인데도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해당 근로자와 고용주 모두에게 벌금을 매긴다.
이 제도로 식코 개봉 당시 5000만 명에 달했던 보험 미가입자는 지난해 기준 2600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보험금 지급액 증가로 과거보다 이윤이 줄어든 보험사들은 “특정 치료 전 반드시 사전 승인을 얻으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환자의 치료 포기,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각종 소송, 보험료 인상 등으로 이어졌다. 그 누적된 불만이 공개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표출됐다. 17일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맨지오니의 사적 제재는 지탄받아야 마땅한데도 일각에서 그를 영웅 취급하는 이유다.
다만 보험업계를 비판하는 미국인 역시 공공보험 강화로 자신의 보험료가 오르는 것은 싫어한다. 특히 중산층은 보험 미가입자의 보험료를 자신이 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의료체계 개선은 필요하나 그 부담을 내가 지는 건 싫다’는 현실과 ‘제도 개편이 시급하다’는 이상의 괴리가 상당하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집권 1기 당시 재정 부담이 큰 오바마케어 폐지를 추진했다. 당시 하원 다수당이던 민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 올 10월 대선 유세 때는 “오바마케어는 형편없으나 없앨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 덕에 생애 최초로 보험 혜택을 누린 국민이 많음을 인정한 것이다.
중국과의 패권 갈등, 불법 이민 근절, 우크라이나 전쟁 및 중동 전쟁 종전 등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현안 앞에서 보험 개혁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 다만 지금 손보지 않으면 미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비용 또한 커질 것이다. 제2, 제3의 맨지오니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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