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문학 거장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는 세계 문학사를 대표하는 고전이다. 1605년 처음 출간된 이래로 수백 년 동안 인기리에 읽히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는 1955년 ‘돈키호테’ 출간 35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잡지를 위해 같은 제목의 특별한 그림(사진)을 그렸다.
이 강렬한 흑백 드로잉은 피카소의 전형적인 입체파 그림과 완전히 다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낙서처럼 자유롭고 강렬한 선으로 묘사돼 있다. 스페인 라만차의 시골 하급 귀족이었던 알론소 키하노는 기사도 소설에 빠져 밤낮 가리지 않고 탐독한 나머지, 급기야 망상에 빠져 스스로 진짜 기사 돈키호테로 여기고 모험을 떠난다. 정의를 세우고 악을 무찌르기 위해서. 농부였던 산초 판사가 그의 종이 되어 따라나선다. 기사 작위는 객줏집 주인에게서 받았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모험도 불사한다.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해 공격하고, 여관을 성으로, 평범한 시골 여인을 공주로 이상화한다. 반면 산초 판사는 그런 주인의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행동을 말리면서도 끝까지 헌신적이었다. 피카소는 이상주의자였던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였던 산초 판사의 캐릭터를 대조적이면서 유머러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돈키호테는 자신처럼 키 크고 비쩍 마른 말을 타고 가다 잠시 멈췄다. 손에는 긴 창과 둥근 방패를 들었지만 조금 지쳐 보인다. 당나귀를 탄 작고 뚱뚱한 산초 판사는 주인을 올려다보며 조언하는 듯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수아즈 질로와 헤어진 후, 자클린 로크와 살고 있었다. 도자기 공방 직원이던 로크는 26세 때 70세의 피카소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피카소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뮤즈이자 헌신적인 동반자로 그의 곁을 지켰다. 피카소에겐 산초 판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상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70대의 거장은 반짝이는 해를 산초 판사 머리 위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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