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약 과다 복용 막을 주치의 시스템 필요[기고/이충형]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19일 22시 54분


이충형 강북구의사회 의무이사
이충형 강북구의사회 의무이사
93세 환자의 보호자인 아들이 방문 진료를 요청했다. 어머니가 기력 저하와 부종이 심해 진찰과 수액 처치 등을 부탁했다. 환자는 4∼5개월 전부터 거동이 불편하여 외출이 어려웠고, 보호자가 대신 평소 다니던 의료기관 3곳에서 약을 처방받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환자의 의식 상태는 졸음이 오는 상태로 반혼수 상태였으며, 전신 부종이 동반되고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

환자와 처음 대면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환자의 약을 검토하는 일이다. 방문 진료가 필요할 만큼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대부분 많은 약을 복용 중이며, 그중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되는 약이 한두 개는 있기 마련이다. 이 환자는 심부전, 고혈압, 당뇨 등으로 인근 병원을 다녔으며, 무릎과 허리 통증으로 정형외과 의원을 이용했으며, 인근 의원에서 골다공증, 위장 장애 및 진통제를 처방받아 복용 중이었다. 약제 평가에서 문제가 되는 약이 여러 가지 발견됐다. 심부전을 악화시킬 수 있는 소염진통제를 두 가지나 복용 중이었고, 식사량이 줄어 당수치가 현저히 낮아졌지만 세 가지 당뇨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의료기관 세 곳에서 처방받은 약에서 동일한 계열의 위장약도 발견되었다. 환자는 혈액 검사 결과 심한 콩팥 손상 및 심부전이 악화한 상태였고, 당화혈색소 수치는 4.9로 이미 오래전 당뇨약을 중단해야 하는 상태였다.

환자의 병이 악화한 주요 이유가 환자가 복용한 ‘약’ 때문인데, 누구의 잘못일까? 의사들은 자신의 의료 지식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진료했을 것이다. 환자의 아들은 어머니의 병에 도움이 되고자 환자 대신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을 것이며, 그 많은 약을 어머니가 하루 3∼4번씩 복용하실 수 있게 정성을 다해 도왔을 것이다.

필자는 주치의가 없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궁극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빠르고 저렴한 가격으로 각 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때로는 위의 환자 같은 사례를 만드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민은 연간 OECD 평균보다 2.5배나 많은 15.7회의 진료를 받고 있으며, OECD 국가 중 노인 다제약물 환자가 서너 번째로 많다.

각 과 전문의의 진료가 나무를 보는 것이라면 주치의의 진료는 숲을 보는 것이다. 각 과 전문의는 분절적으로 자기 전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 환자 안에서 여러 가지 병을 통합해 조화롭게 진료하기 위해서는 주치의가 필수적이다.

바야흐로 약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다. 동시에 약이 병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복합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으며 회복 탄력성이 저하된 노인 환자는 더욱이 약이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5가지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은 그보다 적은 약을 복용하는 사람에 비해 부적절 처방률이 33%포인트 더 높았다고 한다.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개인의 선한 의지에 맡길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주치의가 없는 한국 의료 시스템이 다제약물을 복용하는 노쇠한 노인 환자의 질병을 악화시킬 수 있음을 기억하고, 노인 주치의 제도의 도입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노인#약#과다 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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