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션’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칩플레이션(Cheapflation)’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값이 싸다는 뜻의 ‘칩(cheap)’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싼 상품이 비싼 상품보다 가격이 더 크게 오르는 현상을 뜻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나타난 모습 중 하나다. 한국은행이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라면, 햄 등의 가공식품 가격 변화를 분석해 봤더니 저가 상품의 가격이 16.4% 뛸 때 고가 상품은 5.6% 오르는 데 그쳤다.
소득이 적을수록 저렴한 상품을 찾기 마련이다. 결국 저소득층이 체감한 물가 상승률은 고소득층보다 더 컸다. 칩플레이션으로 인플레이션마저 불평등하게 겪는 셈이다. 한은에 따르면 2019년 4분기(10∼12월)부터 2023년 3분기(7∼9월) 사이 소득 하위 20%의 실질적인 누적 물가 상승률은 13.0%였다. 소득 상위 20%가 경험한 물가 상승률보다 1.3%포인트 높다. 저소득층일수록 더 저렴한 상품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발품을 들일 가능성도 크다. ‘발품 비용’까지 더하면 저소득층의 인플레이션 부담은 더 불어난다.
더 싼 상품으로 장바구니를 채우며 허리띠를 졸라매도 저소득층을 탈출하긴 어렵다. 이는 일주일 전 처음으로 발표된 국가통계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통계청의 ‘소득 이동 통계’를 보면 2021년 소득 하위 20%에 속했던 10명 가운데 7명은 1년이 지난 뒤에도 소득 하위 20%에 머물렀다. 2017년으로 범위를 넓혀 보면 5년 내내 저소득층에 머문 이들은 10명 중 3명이었다. 2022년과 2021년을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낮은 소득 계층으로 떨어진 사람도 17.4%나 됐다.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역동 경제’였다. 올 7월에는 “역동 경제로 서민, 중산층 시대를 구현하겠다”며 중장기 과제를 담은 로드맵도 내놨었다. 로드맵의 3대 축 중 하나가 사회 이동성 개선이었다. 계층 이동이 활발히 이뤄지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계 소득·자산 확충, 핵심 생계비 경감, 재기 지원 강화 등이 제시됐다. 15%에 육박하는 상대적 빈곤율을 2028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까지 낮추겠다는 식으로 목표도 여러 개 설정했다.
‘12·3 비상계엄’으로 현 정부의 정책들은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역동 경제 로드맵 역시 ‘윤석열표’ 정책으로 조용히 잊혀질 게 뻔하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선 계층 이동을 통한 성공 사다리의 복원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계 소득·자산 확충을 비롯한 그 방법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삶은 팍팍하고 계층 이동은 꿈조차 꿀 수 없게 되면서 ‘운’에 기대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올 3분기 복권을 구매한 가구 비중은 같은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다시 썼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가져온 경제 정책 공백은 내년 상반기(1∼6월)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미 세워둔 중장기 과제들 가운데 여야가 함께할 수 있는 지점들은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한다. 중장기 구조 개혁까지 멈춰 서면 국가 경제마저 운에 기대야 하는 미래밖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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