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평면설, 한국전쟁 북침설, 달 착륙 조작설, 기후 위기 허구론…. 세상엔 참 많은 음모론이 있다.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세월호 참사 같은 충격적 사건엔 어김없이 음모론이 뒤따랐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란 용어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음모론자를 낙인찍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만들어낸 것이란 음모론까지 있을 정도다.
이토록 음모론의 생명력이 강한 건 본래 인간이 음모론에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확증편향). 대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사실 왜곡엔 눈감고 넘어가기도 한다(동기화된 추론). 이런 인지적 한계 때문에 똑똑하고 이성적이던 사람조차 음모론에 휩쓸릴 수 있다. 음모론을 단순히 망상 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취급하며 조롱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음모론에 취약한 성격이 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유독 음모론에 더 잘 빠지는 성격이 있다. 미국 심리학자 리처드 맥널리는 ‘외계인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연구했다. 수면마비(가위눌림) 현상을 외계인 납치로 굳게 믿는 음모론자인데, 정신감정을 하면 정상으로 나온다. 대신 심리 평가 결과 이들은 비전통적인 인과관계를 강하게 믿고 환상적인 것에 끌린다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점괘나 부적, 저주와 예언이 실제 힘이 있다는 믿음은 음모론과 맞닿아 있다.
유럽 연구팀의 실험 결과도 비슷하다. 동전 던지기처럼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굳이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일수록 음모론을 더 쉽게 믿었다. 있지도 않은 패턴을 발견하는 사람, 즉 미신 신봉자는 음모론에 취약하다.
댄 애리얼리 미국 듀크대 교수에 따르면 지적 겸손 수준과 나르시시즘은 음모론과 관련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지적 겸손이 부족하면 음모론적 사고에 끌리기 쉽다. 특히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위험하다. 상황이 뭔가 잘못됐을 때, 분명히 자기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며 비난 대상을 찾느라 음모론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가 지도자가 음모론에 휩쓸리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줬다. 다시 이런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음모론자의 성격적 특징을 제대로 알아둬야겠다. 앞으로 리더를 뽑을 땐 꼭 검증하자. 미신에 현혹되진 않는지, ‘나만 옳다’는 독불장군은 아닌지, 나르시시즘이 지나치진 않은지.
가까운 사람이 음모론에 빠졌다면
정치 지도자라면 음모론자와 거리가 먼 인물로 잘 골라 뽑는 방법으로 걱정을 좀 덜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음모론자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거리 두며 모른 척하고 싶기도 하다. 말해 봤자 듣지도 않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건 사회적 고립감이 이들을 음모론에 아주 깊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에선 따돌리고 배척할 때, 음모론 집단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지지를 보내준다. 소속감과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주장은 한층 과격해진다. 진실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집단 소속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된다. 끈끈한 유대감은 이를 끊고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 사이비 종교 집단과 유사하다.
결국 무시와 배척으로는 음모론을 잠재울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건 관심과 경청이다. 너무 깊숙이 빠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고, 음모론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에 귀 기울여 주자. 내면의 결핍과 불안, 스트레스를 일깨워 준다면 생각은 조금씩이나마 바뀔 수 있다. 어렵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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