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군 투입 지시 거부… 장군은 대통령에도 ‘노’ 할 수 있어야”[월요 초대석]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29일 23시 15분


민병돈 전 육사 교장이 말하는 12·3 계엄과 장군의 길

독재국가에나 있을 터무니없는 계엄
장군은 상관 지시 아닌 헌법 따라야
부당 지시 못 막으면 부하들 사지로
진급 청탁 악습이 예스맨 장군 양산

집 낡아 난방비 아끼려 보일러 안 때
6시간 냉골 인터뷰 내내 허리 꼿꼿
장례 때 수의로 전투복 입혀달라 유언
군인으로 태어나, 군인으로 죽고 싶다

민병돈 전 육사 교장이 20일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자택 서재에서 1987년 육군 특전사령관으로 복무할 때 쓰던 전투모를 들어 보였다. 그가 당시 입었던 중장 계급장이 달린 예복과 근무복, 전투복이 벽에 나란히 걸려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89·예비역 중장)은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 투입 지시를 거부한 장군이다. 당시 최정예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특전사령관이었던 민 전 교장은 계엄령 예고와 함께 군 병력을 준비시키라는 대통령에게 명령 취소를 요청했다. 무력 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할 특전사령관의 반대로 군 동원은 무산됐고 얼마 뒤 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다. 당시 독재 반대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지 않았던 데는 민 전 교장의 항명도 한몫을 했다.

1989년 퇴역한 민 전 교장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주택에서 52년째 살고 있다. 최근 그의 집을 방문해 신발을 벗고 발을 딛는데 바닥이 얼음장 같았다. 낡은 집이라 난방비 부담이 커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고 했다. 카디건 차림의 그는 코트를 벗으려는 기자에게 “괜찮다. 입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기자는 코트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서재 바닥에 그와 마주 앉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어떻게 보나.
“터무니없는 과잉 조치다. 계엄을 하려면 요건이 있다. 전시에 준할 정도로 나라가 위태로워야 하는데 그건 아니었잖나. 최고 권력자가 마음대로 계엄을 선포하는 건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짓이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도 있었다.
“정치적인 범죄다. 국회가 계엄에 반대하면 취소해야 한다고 헌법에 나와 있는데 그걸 피하려고 했던 거 아닌가. 검찰총장까지 했으면 그 정도는 알 텐데 무식한 사람이나 할 짓을 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사령관들이 대체로 따랐다.
“장군은 맹종하면 안 된다. 눈 밖에 안 나려고 계엄 관련 지시를 군소리 없이 따랐다면 그건 장군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군 통수권자 지시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장군은 윗사람 지시가 아니라 헌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헌법 정신을 늘 체화하고 있어야 한다. 이번 계엄 지시는 당연히 따르지 말았어야 할 명령이다.”

―그러다 항명죄로 처벌될 수 있지 않나.
“그게 두렵다면 장군이 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장군이라면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투원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전략을 구사하는 장군은 다르다.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이용하려 들 수 있다. 장군은 거기에 놀아나지 않고 군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위법한 지시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럴 때 정확히 판단하라고 참모가 있는 것이다. 법무장교들 있지 않나. 지휘관 혼자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으니 장군으로서 책임감 있게 결심하라고 참모 조직을 둔 것이다.”

―이제 와서 책임을 위로 넘기려는 장군들이 있다.
“(계엄 관련 지시가 부당하다는 걸) 알고 한 일 아닌가. 군소리 없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걸 피하려고 발버둥 치면 이중 삼중으로 자격 없는 사람들이다.”

―현장 투입 장병들은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원래 전투원은 명령에 따르는 게 원칙이다. 지시가 맞는지 갑론을박하면 작전이 실패해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다. 다만 더 중요한 건 장군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점이다. 전투원은 명령을 따라야 하는 사람들인데 장군이 잘못된 상부 지시를 그대로 하달하는 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짓이다.”

민 전 교장의 서재 책장에는 1980년대 장군으로 복무할 당시 직함이 쓰인 명패가 칸마다 놓여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대통령의 장군 승진 청탁도 거절
민 전 교장은 1987년 6월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군 투입 지시를 받았을 때 특전사 정보장교들을 시위 현장에 보냈다. 그들은 “군이 진압한다고 진압될 것도 아니고 시위대의 주장이 사실 다 옳다”고 보고했다. 민 전 교장은 “1980년 5월에 이어, 또 유혈사태가 나면 엄청난 국가적 불행이 될 것 같아 군 동원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육사 선배이면서도 그가 1공수여단장 때 내가 그 밑에서 대대장을 한 적도 있어 오랜 인연이 있었다. 하지만 군 투입은 공적인 문제다. 더구나 당시 나는 무력 진압의 성패를 좌우하는 특전사령관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기어이 군을 투입시킨다면 그걸 저지할 계획도 짜놨다. 군이 궁극적으로 충성해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지 않나.”

그해 민 전 교장은 전 전 대통령의 승진 청탁을 거부하기도 했다. 준장(원스타) 진급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민 전 교장에게 ‘각하가 박○○ 대령을 진급시키고 싶어 한다’는 쪽지가 전해졌다. 그때만 해도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점찍은 대령들이 별을 다는 일이 흔했다. 민 전 교장은 그런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콕 집은 박 대령까지 탈락시켰다.

“박 대령은 같이 근무를 해봤는데 능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파렴치한 짓을 했다. 지프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내고는 뺑소니를 쳤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잘못을 했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맞는데 아무 일 없이 넘어간 점이다. 잘못을 무마시킬 능력이 있었던 거다. 그 능력으로 나쁜 짓도 능히 할 사람이란 얘기다. 이런 사람이 장군이 돼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

이번 비상계엄 가담자 중에는 불명예 전역한 예비역 장성임에도 현역 장교들을 지휘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최측근인 그는 진급을 미끼로 이들을 계엄에 끌어들였다. 별을 달게 해주겠다는 제안에 여러 장교들이 넘어갔다.

“승진 청탁은 그 자체도 나쁘지만 장군이 돼선 안 될 사람을 장군으로 만들어 주는 게 더 큰 문제다. 백(back)을 써서 별을 달면 신세 진 사람이 시키는 일에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 ‘예스맨 장군’이 그렇게 나온다.”

육사 졸업식에 온 대통령 면전에서 비판
민 전 교장이 군복을 벗은 건 육사 교장이던 1989년 육사 졸업식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졸업식사를 하러 단상에 오른 민 전 교장은 대통령에 대한 경례도 생략한 채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대북 유화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전임 교장들은 졸업식사에서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곤 했는데 그런 건 없고 훈련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에 몸을 던진 고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1989년 3월 21일 열린 육군사관학교 45기 졸업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그 옆에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민 전 교장.  동아일보DB
1989년 3월 21일 열린 육군사관학교 45기 졸업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그 옆에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민 전 교장. 동아일보DB

―대통령 면전에서 왜 그런 얘기를 했나.
“남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건 군인들도 동의하지만 방법과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당시 전방에서 고생하던 장병들은 우리의 적이 북한이 맞느냐고 혼란스러워했다.”

―대통령은 항명으로 느꼈을 수 있겠다.
“육사 졸업식에서 대통령은 손님일 뿐이다. 사관생도와 교관들이 주인공인 행사다. 사병을 지휘할 소위가 탄생하는 자리인데 대통령 체면 세워 주는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다. 군인은 교본을 보고 성장하는 게 아니다. 지휘관이나 선배의 모범을 보고 인격적으로 닮아가면서 성장한다. 나중에 장군이 될 생도도 있을 텐데 군인은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걸 배워 갔으면 했다.”

민 전 교장이 20사단장을 할 때 육군참모총장 등 고위 장성들이 훈련 참관을 온 적이 있다. 그는 참모장이 장성들 점심으로 바비큐와 민간업소 도시락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크게 혼내면서 장병들이 먹는 전투식량을 똑같이 주라고 했다. 장성들은 전투식량 먹는 법을 몰라 당황해했다고 한다.

당시엔 선거 때마다 장병들이 여당에 투표하도록 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곤 했는데 사단장이던 그는 예하 부대에 ‘선거 부정에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해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품성 때문인지 군 시절 그의 별명은 ‘민따로’였다.

“전쟁은 가장 불합리한 상황의 총집합이다. 지휘관은 평시에 가장 합리적으로 부대를 지휘해야만 가장 불합리한 전시 상황에서 부하들을 적진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 어느 조직이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법이다. 상관에게 휘둘리고 명분을 잃어버린 지휘관을 부하는 다 알아본다. 지휘관의 명령이 옳으면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그 명령에 따른다.

37년째 서재에 걸어놓은 군복 세 벌
민 전 교장은 ‘졸업식 사건’ 한 달 뒤 35년간 입어 온 군복을 벗었다. 정치권과 기업에서 러브콜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고 군인연금으로 생활해 왔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을 것 같다.
“공직을 떠나면 생활 수준이 당연히 떨어진다. 그 점을 늘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장군 시절에도 영관 장교처럼 살았다. 그만두면 연금이 영관 월급 정도 되니까. 최선의 노후 대비는 현역 때 검소하게 사는 것이다. 그 습관이 노후에 자기 생활이 된다. 현역 때 높고 좋은 자리에 있다고 화려하게 지내는 건 옷 벗고 나간 다음에 고통을 자처하는 거다.”

―퇴임 후 삶에 만족하나.
“행복이 뭔가.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사는 거 아닌가. 전역 이후 35년을 나는 그렇게 보내고 있다. 며칠 뒤면 90세인데 아직 크게 아픈 데가 없다. 50년, 60년 전 부하들을 지금도 만나는데 80세가 넘은 그 친구들이 나한테 소대장님, 중대장님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다정하고 좋나.”

민 전 교장과의 인터뷰는 20일 4시간, 26일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서재 바닥에 양반다리로 마주 앉았는데 다리를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는 기자와 달리 그는 허리를 곧추 펴고 흐트러짐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겨울에 난방을 안 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야전에 있을 때부터 이러고 살아서 익숙하다”고 했다. 그는 휘문중 재학 시절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왼팔에 총상을 입고도 몇 년 뒤 육사에 진학했다. 월남전에도 파병돼 무공훈장을 받았고 전투 부대 지휘관을 오래 했다.

민 전 교장이 특전사령관 때 입었던 군복들. 맨 오른쪽에 걸려 있는 게 전투복이다.

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민 전 교장의 서재 한쪽 벽에는 군복 세 벌이 37년째 걸려 있다. 그가 특전사령관 때 입었던 중장(3성) 계급장이 달린 예복, 근무복, 전투복이다. 셋 중 맨 오른쪽에 있는 전투복에 특히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자식들한테 진작 유언을 해놨다. 나 죽으면 수의 필요 없고, 관속에 들어갈 때 저 전투복 입혀 달라고. 나는 군인으로 태어났고, 군인으로 죽고 싶다.”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

△ 1951년 휘문중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 1959년 육군사관학교 졸업(15기)
△ 1970년 베트남 파병 9사단 28연대 작전주임
△ 1981년 육군 특전사 3공수여단장(준장)
△ 1983년 20사단장(소장)
△ 1987년 특전사령관(중장)
△ 1988년 육사 교장(1989년 중장 예편)

#민병돈#6·10 민주항쟁#전두환#군 투입 지시#계엄령#장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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