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창간 90주년인 2010년부터 5년간 ‘10년 후 한국을 빛낼 100인’을 선정한 바 있다. 2024년이 가기 전 “여기 2014년 뽑힌 100인 중 한 명이 있어요!” 외치고 싶은 주인공을 찾았다. 그때는 영광이었으나 지금은 피하고 싶을 듯한, 고난의 성배를 받은 인물이다.
27일 대통령 권한대행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직함을 갖게 된 최상목(61). 10년 전 얼굴 뽀얀 동안(童顔)이던 그는 당시 기획재정부 정책협력실장이었다. 추천 사유는 ‘실력과 평판, 청렴성 모두 우수함’.
이제 그 실력과 평판을 유감없이 발휘해 한국을 빛내야 할, 아니 구해야 할 때다. 윤석열의 터무니없는 비상계엄 도박 때문에, 한덕수의 무책임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 때문에, 더구나 여객기 참사까지 터지는 바람에 최상목이, 한국경제가,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다. 2024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어깨에 대한민국의 명운이 달렸다.
최상목은 대통령 윤석열이 3일 밤 불법 비상계엄 선포 직전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강하게 반대 의견을 밝히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올곧은 인물이다. 즉각 사의를 표하려 했으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만류했다. 나라에 경제 사령탑이 버티고 있어야 대외적으로도 투자심리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최상목은 곧바로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참여하는 긴급 심야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회의)를 여는 등 국내외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가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건 과거 경험이 있어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최상목은 기재부 제1차관이었다. 아무래도 보고 배운 것이 적지 않았을 터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탄핵소추안이 27일 가결되자 최상목은 당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부터 열었다. 미국 정부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한국 정부와 함께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즉각 밝혔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도 중요한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 역대정부 최하위 경제성적에 텅 빈 나라 곳간
앞길이 캄캄하긴 하다. 계엄과 탄핵사태 이전에도 윤 정부의 경제성장률은 역대 최하위였다. 지난해 경제성장률 1.4%. 집권 첫해 2.7%에서 거의 반 토막 났고 잠재성장률 2%대에도 못 미치는 처참한 수준이다. 올해 성장률이 IMF와 KDI 전망처럼 2.2%일 경우, 현 정부 집권 3년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2.1%에 그치게 된다. 문재인 정부(3%)나 박근혜 정부(3.1%)의 첫 3년 평균 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지진아 정부다.
그런데도 윤 정부 임기 반환점인 지난달 기재부는 자화자찬 보도 자료나 내놨다. “물가 안정, 고용 확대, 수출 활성화를 통해 글로벌 복합 위기의 충격을 최소화했다”는 낯 뜨거운 내용이다.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에이스 관료로 소문났던 최상목이 왜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아부성 자료나 쏟아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경제수석을 지내고 경제부총리까지 됐으면 이미 ‘경제 대통령’이다. 윤석열에게 잘 보여 무슨 출세를 더 하려고?
윤석열 임기 첫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중 갈등 확대까지 대외 경제 여건이 악화된 건 사실이다. 윤석열의 건전재정 방침에 따라 과거처럼 재정을 퍼붓지 못한 점도 없지 않다. 가계부채·국가부채가 쌓여있고, 야당이 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아 애가 타기도 했을 터다(그렇다고 계엄이 정당화될 순 없다!). 부자감세로 세수가 부족해 국고는 텅 비었고, 이미 온갖 기금에서 돈을 갖다 쓴 탓에 재정을 투여할 여력도 없고 해외 신인도까지 추락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안 나오는 형국이다.
● 위공 박세일 “한국 미래가 여러분 어깨에 걸렸다”
2014년 최상목은 동아일보 ‘10년 후 한국을 빛낼 100인’ Q&A에서 “인생을 바꾼 순간이 있었나요?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귀하의 인생을 바꿨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학교 3학년이 될 무렵 법해석을 통한 사후구제적인 사법부의 역할보다는 사전적으로 법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행정부의 역할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전공인 법학서적을 덮고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상목이 속한 서울법대 82학번은 일명 ‘X파리’로 유명하다. 판검사의 용꿈에 부푼 그들 앞에 미국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패기 넘치는 교수가 나타나 말했다. “여러분은 사회에서 엄청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후진국에서 이제 막 벗어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선진국을 물려줄 것이냐 하는 과제가 여러분 어깨에 달렸다. 판검사보다 대한민국 선진화를 위해 뛰는 공직자가 되어 사회에 보답하라. ”
2017년 1월 세상을 떠난 고 박세일 교수다. 당시 젊은 교수의 진정 어린 호소에 감동한 ‘X파리’들은 ‘법경제학회’를 만들었고, 상당수가 ‘사시’에서 ‘행시’로 진로를 바꿨다. 법대를 수석 졸업한 최상목이 위공(爲公) 박세일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미래가 여러분 어깨에 걸려 있다” “공직자가 일을 잘해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는 위공의 가르침을 최상목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 권한대행의 권한대행도 공직자…헌법재판관 임명하라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최상목의 첫마디가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천번만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은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덧붙인 건 걱정스럽다. 만일 최상목이 한덕수처럼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을 보류한다면, 국정 혼란은 계속될 게 분명하다.
2016년 탄핵사태를 돌아보면 안다. 태블릿 PC문제가 터지자 주가는 푹푹 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급등했다. 코스피 지수가 1963에서 곧바로 2000을 넘었고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를 파면한 다음날은 2100으로 뛰었다. 두달 뒤 대선까지 2200으로 올라갔다. 경제가 제일 싫어하는 불확실성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권한대행의 권한대행도 공직자는 공직자다. 단 하루를 그 자리에 있더라도 공직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위공은 가르쳤을 것이다. 곧 위공 8주기가 돌아온다. 스승을 기억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 아닌 오늘 당장이 최상목 당신의 어깨에 걸려있음을 절감한다면, 최상목은 헌재 재판관 3명부터 하루 빨리 임명해야 한다.
● ‘질서 있는 탄핵’이 나라와 경제 살릴 것
경제는 심리와 신뢰다. 계엄이 옳지 않다고 뛰쳐나왔던 최상목이면 ‘질서 있는 탄핵’이 불확실성 해소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 이 복잡한 상황에 재판관이라도 임명하면, 정치리스크로 인한 경제 리스크도 가라앉기 시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상목처럼 서울법대 나오지 않은 다수 국민도 “총 쏴서 들어가서 (의원들) 끌어내라”고 했다는 윤석열, 입만 열면 거짓말로 온국민을 속여온 윤석열, 검찰총장 출신이면서 신군부 전두환보다 악랄하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은 용납 못한다. 설령 온갖 법기술과 둔갑술로 헌재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그런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다시 모실 순 없는 일이다. 그래도 위공의 제자 최상목은 재판관도 임명 않음으로써 윤석열 편에 설 터인가.
그간 윤석열이 죽어도 안하던 ‘야당과의 협치’도 최상목은 해냈으면 한다. 윤석열이 알지도 못하면서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있던 ‘건전재정 도그마’도 폐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를 돕고 내수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수정부의 참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입으로만 자유와 시장경제를 외치던 윤석열 눈치 보느라 그 동안 감히 못했던 정책들, 법경제학회 시절 배웠던 위공의 가르침도 한껏 펼침으로써 최상목이 한국을 빛내고 또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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