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래: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후한 말 조조(曹操)는 촉한(蜀漢)의 한중 땅을 놓고 유비(劉備)와 싸웠는데 군량미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비록 승리한다 해도 한중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어느 날 저녁 조조가 닭고기로 만든 국을 먹고 있는데 부장 하후돈이 들어와 그날의 군호를 묻자 조조는 ‘계륵(鷄肋·닭갈비)’이라 했습니다. 계륵은 먹을 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으로 한중 땅을 비유한 것이었지요.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챈 참모 양수(楊脩)는 군사들과 함께 후퇴 준비를 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챈 양수의 총명함을 시기한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한 뒤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는 죄를 씌워 양수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 뒤 조조는 수척해진 양수의 아버지 양표(楊彪)를 만나 “공은 어찌 그리도 야위었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양표가 답하기를 “김일제(金日磾) 같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없는 것이 부끄럽고 그저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사랑만 품고 있었음을 후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조조는 자세를 고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 생각거리: 양표가 언급한 김일제(金日磾)는 한나라에 귀순한 흉노 왕족으로 한무제(漢武帝)에게 큰 신임을 받아 김씨(金氏) 성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무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무제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궁녀를 희롱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순하다고 생각해 장남을 죽이고 무제에게 보고했습니다. 무제는 화를 냈지만 김일제가 자초지종을 고하자, 슬퍼하면서도 김일제의 충성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매사에 조심한 덕에 김일제 가문은 후한 때까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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