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영화가 필요 없는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30일 23시 09분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연간 2억 명이 넘던 국내 극장 관람객 수가 지난해엔 절반에 머물렀고,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내년 대한민국 영화 산업도 큰 희망은 없어 보여요. 왜냐고요? 한국인은 더 이상 극장에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자 세계 1등이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100년 가까이 ‘등 따시고 배불렀기’ 때문이에요. 사회가 안정되고 돈이 돌면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현실엔 없는 불편한 감정과 억압적 심리를 청개구리처럼 욕망하게 되고, 이는 재난-전쟁-공포 영화의 소비로 이어지죠.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처럼 하루하루가 재앙-경악-슬픔의 스펙터클이라면, 굳이 돈 내고 극장에 가서까지 스트레스를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죠. 생각해 보세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민이 극장에 가서 전쟁 영화를 보고 싶겠느냐고요.

[2] 최근 국내 재개봉한 일본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의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년)도 그래요.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네오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초능력을 가진 정체불명 존재들의 등장을 통해 사회적 혼란과 국가적 음모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디스토피아적으로 풀어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재난, 혼란, 음모, 디스토피아. 2024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니면 뭐란 말이에요.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의 신작 ‘하얼빈’(24일 개봉)도 다르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숨이 턱턱 막혀요. 그러잖아도 진지한 세상에 이토록 무겁고 둔탁한 영화라니요.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말해야만 하나? 더 깨어 있고 자유롭고 창의적일 순 없었을까? 치열한 만큼 치밀할 순 없었을까? 하긴, 미국에서도 ‘링컨’을 다룬 영화치고 성공한 영화가 없지. 우울한 연말이 된 건 영화 탓이 아닐 텐데.

[3] 그나마 기대했던 속편들마저 하나같이 기대를 저버린 것이 연말 극장가의 트렌드라면 트렌드예요. ‘조커’의 속편인 ‘조커: 폴리 아 되’는 배신감마저 느껴졌어요. 호아킨 피닉스라는 명배우의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품게 만든 작품이죠. 영화 ‘마스터’(2012년)에서 탁월했던 그의 정신분열 연기는 ‘조커’(2019년)로 정점을 찍은 뒤 ‘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년)에 이어 올해 ‘조커: 폴리 아 되’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지루할 만큼 자기 복제되고 있어요. 예술가는 성공을 복붙(복사해 붙여넣기)하기보단, 성공을 원수로 삼고 그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나려는 용기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영화 ‘서브스턴스’. 배우 데미 무어가 실제 자신을 조롱한 자기풍자? NEW, 찬란 제공
영화 ‘서브스턴스’. 배우 데미 무어가 실제 자신을 조롱한 자기풍자? NEW, 찬란 제공
이런 점에서, 올해 62세인 여배우 데미 무어야말로 제겐 올해의 발견이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녀는 28세 리즈 시절 ‘사랑과 영혼’(1990년)으로 ‘로미오와 줄리엣’(1968년)의 올리비아 핫세 같은 자리에 올랐지만, ‘지. 아이. 제인’(1997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최근에는 무릎 위 늘어진 살을 제거하는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둥 7억 원을 들여 전신 성형을 했다는 둥 각종 소문에 휩싸이면서 늙음에 추할 만큼 저항하는 비호감 셀럽으로 전락했죠. 이런 그녀가 ‘서브스턴스’(11일 개봉)라는 문제작에 출연했어요.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 내용이 기괴한 수준을 넘어서요. 과거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대스타였지만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로 전락한 ‘엘리자베스’로 데미 무어가 출연해요. 늙음을 저주하던 엘리자베스는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비의 약물 서브스턴스를 스스로 주사해요. 그 뒤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젊고 섹시한 또 다른 여성 ‘수’가 그녀의 몸을 뚫고 나와요. ‘수’와 ‘엘리자베스’의 다툼은 점차 눈뜨고 보기 힘든 고어물(gore物·선혈 낭자한 잔인한 영화)로 치달아요. 영화 밖의 나와 영화 속의 나를 일치시키는 용감한 자기 조롱과 자기 파괴. 이 정도는 돼야 진정 자유로운 예술가 아닐까 말이에요.

[4] 만들어진 지 41년 만인 지난달에야 국내 개봉한 일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년)는 명작은 아니지만,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거리가 퍽 많았어요. 오시마 나기사가 자신의 출세작인 ‘감각의 제국’(1976년) 스타일이 아니라 루이스 부뉴엘(스페인 출신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초현실주의 영화의 선구자)적으로 찍은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무사도 정신을 신봉하는 일본군 대위 ‘요노이’가 포로로 잡힌 영국군 소령 ‘잭’을 포로수용소에서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전쟁 영화냐고요? 아니에요. ‘요노이’가 ‘잭’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동성 간에 느낀다는 내용이죠.

마음의 자유여, 생각의 자유여! 불온한 상상을 여가처럼 즐기는 걱정 없고 안온한 날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올까요?

#영화 산업#재난 영화#디스토피아#사회적 혼란#데미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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