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甲辰年) 한 해가 당혹과 충격, 혼란과 슬픔 속에 저물고 있다. 연초부터 디올백 수수 영상, 느닷없는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4·10총선 후에 더 격해진 정치싸움, 브로커 명태균 파문이 이어졌다. 국민 삶에서 걱정을 덜어야 할 정치가 국정과 일상에 멍에가 된 가슴 답답한 한 해였다. 2%에도 못 미치는 경제성장, 믿었던 반도체 산업의 저조 등 경제에 어려움이 컸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처럼 청량제 같은 순간도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곧바로 국회에 의해 해제됐고, 11일 뒤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면서 직무에서 배제됐다. 역사의 시계를 1980년쯤으로 되돌린 폭거였지만, 대통령의 잘못을 곧바로 바로잡는 민주적 절차를 지녔음을 확인한 건 작은 위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직 대통령이 총과 도끼 사용을 재촉했다는 검찰 공소장이 공개됐고,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탄핵된 뒤엔 전남 무안에서 179명이 숨지는 항공기 참사가 발생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16년 박근혜 탄핵 때도 우울한 세밑을 맞았지만, 충격과 상실을 올해와 비교하기 어렵다.
올해는 집권 3년 차를 맞아 대통령이 초반 실수를 딛고 국정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외려 혼란은 더 깊어졌다. 그 출발점이 대통령 부부였다는 점이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의대 증원, 공천 개입, 명태균 음성파일 등은 “문제는 대통령 부부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024년이 ‘부부의 난(亂)’으로 얼룩졌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독단적인 ‘불통 리더십’은 불쑥 내놓은 의대 증원 정책에 따른 의정 갈등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대학병원 전공의 1만 명이 반발해 집단 사직했고, 의대생은 동맹 휴학에 돌입했다. 고통은 환자와 가족들의 몫이 됐다.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왜 2000명이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정부의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국정이 이럴 수는 없다는 믿음이 퍼져 간 2024년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던 연금·노동·교육 개혁도 한낱 수사(修辭)로만 남은 상태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준 것은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이었다. 우리가 긴 시간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축적한 우리 글과 생각의 힘을 세계가 인정해 준 것이었다. 대통령 탄핵과 한강의 스웨덴 시상식 장면이 겹쳐진 12월 어느 날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이질적 두 얼굴이었다. 여기에 8월 파리 올림픽에선 태극전사들이 활, 총, 칼 등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 낭보가 들려왔고, 탄핵의 순간에 평화로운 집회를 이끈 시민들의 역량도 돋보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내년 1월 복귀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동맹에 어떤 어려움을 몰고 올지에 대한 걱정이 늘고 있다. 주한미군의 성격, 한미 방위비 협정 개정 등 안보 영역 외에도 트럼프가 예고한 관세 도입 및 첨단기술 정책 구상은 한국의 대미교역 구조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리스크의 불가측성은 핵무기를 지닌 채 우리를 “철저한 적대국가”로 헌법에까지 명문화한 북한 변수가 오히려 작게 느껴질 정도다. 정부는 주도면밀해야 할 때이지만, 정부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무안 참사의 수습과 정확한 원인 규명을 통한 미래 대책 마련이다. 우리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연하게 헤쳐 온 유전자(DNA)를 갖고 있다. 어떻게든 극복 방법을 찾을 것이고, 얼마 후엔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정치의 실패를 확인했지만, 그건 정치인의 실패이지 국민의 실패는 아니다. 대통령선거가 있을 수 있는 새해, 더 단단히 묻고 검증하면서 주권을 행사하면 된다. 2024년 갑진년 우리를 덮쳤던 혼란과 어둠이 한 해의 마지막 석양과 함께 사라지고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 출발을 위한 여명(黎明)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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