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해소법은 제거가 아닌 이해와 순화”[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31일 23시 03분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정신분석학은 ‘갈등 심리학’입니다. 비중은 줄었으나 갈등을 잘 다뤄야 합니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가 서로 뒤엉켜 다투는 것’입니다. 칡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성질이 있어 가까이 있으면 서로 얽힌다고 합니다. 영단어 갈등(conflict)의 어원도 ‘서로 부딪치다’ ‘상반된 욕구들의 충돌’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신분석에서는 현실보다는 내면의 갈등이 주가 됩니다. 한편에서는 이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러해서, 서로 다른 마음 조각들이 충돌해 머뭇거리느라 지나치게 힘이 쓰입니다. 갈등의 전형적인 구조는 과거의 패턴을 되풀이하려는 욕구와 현재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시도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생산적인 현재를 지향해도 자기 파괴적인 과거의 성향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의도로 분석가를 찾지만 낯선 것을 회피하고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늘 동합니다. 서로 어긋나는 두 마음이 부딪칩니다.

이때 현대 정신분석가는 피분석자 마음에 오래 자리를 잡아 온 갈등을 통째로 들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생 자체가 갈등 덩어리임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갈등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생산적으로 순화하도록 돕습니다. 피분석자 스스로는 어떤 갈등 구조에 왜, 어떻게 해서 빠져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분석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되풀이해서, 꾸준하게 들은 뒤 스스로 이해한 바를 쉽게 풀어서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게 한 번 한다고 해서 즉시 깨닫지는 못합니다. 반복하면 가랑비에 젖어들 듯이 ‘통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역시 곧바로 근원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쌓이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해야 변화합니다.

갈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내적인 갈등에 구체적으로 다퉈야 하는 상대편까지 더해진 외적 갈등은 더욱 복잡합니다. 대인관계로 촉발된 갈등을 해소, 적어도 순화하려면 양쪽 모두가 진정성 있는 대화에 참여해 실천해야 합니다. 싸움으로 이어지는 ‘충돌’이 아닌 대화로 연결되는 ‘접촉’이 전제조건입니다.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의 입장이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서로 작정하고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밖으로 보이는 것과 안에 숨은 것을 합하면 이 사람, 저 사람 꽤 비슷합니다. 갈등의 원천 해소는 불가능해도 공감과 양보를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크게, 멀리 보면서 눈앞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그렇게 됩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에서는 이해관계가 치밀하게 얽힙니다. 이렇게 저렇게 상대 집단에 따지면서 벌떼처럼 일어나면 갈등이 증폭됩니다. 한계를 넘으면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뒤엉켜 치열하게 다투면 튼튼했던 나무조차 그 와중에 살아남지 못하고 고사(枯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집단이라도 민주적이지 않으면 갈등 해소 가능성은 원천 봉쇄됩니다.

정신분석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워 증폭시키는 방식은 이롭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집단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전면 배치해서 균형을 맞춰야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당장 쉽게 풀 문제는 쉽게 풀고, 풀기 어려운 문제는 미뤄야 합니다. 명분에 매달려 생산적인 방식을 방치하고 파괴하는 것은 실책입니다.

흔히들 갈등 관계의 상대편을 완벽하게 제거하면 성공했다고 착각합니다. 압도적으로 이겨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내부에 숨어 있는 문제와 그로 인한 갈등은 외부의 공격 대상이 사라지는 시점에 서서히, 또는 급속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진다고 해서 완전히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칡이나 등나무의 싸움이 남긴 척박한 토양과 숲의 실종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애를 써도 내가 내 그림자를 없앨 수 없는 것처럼 갈등도 제거가 아닌 순화의 대상입니다. 순화는 충돌이 아닌 접촉으로 이루어집니다. 접촉이라는 상차림에서 공감, 이해, 양보는 기본 메뉴입니다. 파국을 맞을 것인가, 공동체를 지킬 것인가. 충돌은 내리막길, 타협은 오르막길입니다. 내리막길은 가속도가 붙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힙니다. 오르막길은 힘들고 숨차지만 참고 견디면 넓은 세상이 눈앞에 다가옵니다.

#갈등#해소법#이해#순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