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외환시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외국인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에 이르렀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와의 협상에 나섰고, 결국 10월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 스와프를 성사시켰다. 기획재정부, 한은은 물론이고 민간에서까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물밑에서 힘을 보탠 결과였다. 이 같은 각종 조치에 힘입어 환율은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있던 환율 1500원의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2008년은 금융위기 상황으로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던 때였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자초한 위기라는 게 더 당혹스럽다. 비상계엄에 이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까지 탄핵되는 정치 리스크에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12월 30일 1472.5원에 주간거래를 마치는 등 15년여 만에 1500원에 육박하고 있다. 1년 새 무려 184.5원이나 껑충 뛴 것이다. 전문가들은 심리적 방어선으로 여겨지던 1400원, 1450원이 연달아 무너진 만큼 현재와 같은 정국 불안이 장기화되면 원-달러 환율이 곧 1500원에도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다.
당국은 시장 안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구두 개입은 이미 수차례 이뤄졌고 국민연금과 한은의 외환스와프 한도도 늘렸다. 하지만 주저앉는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인 가운데 고환율은 당장 우리 삶과 경제를 조여오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환율이 오른 만큼 늘어난 수입 결제대금을 감당해야 한다. 대기업도 외화부채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고환율은 고물가를 부추기며 가정의 생활고도 심화시킬 것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까지 1인 4역을 맡고 있는 초유의 상황이지만 원-달러 환율 1500원이 ‘뉴노멀’이 되는 일만은 막아내야 한다. 외환당국이 “대응 여력은 충분하다”고 거듭 밝히며 애써 느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치열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주요국과의 통화 스와프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카드를 꺼내놓고 대책을 설계할 때다.
급한 불을 끈 뒤에는 근본적인 구조개혁에도 나서야 한다. 환율은 결국 한 나라 경제의 바로미터다. 정치적 혼란이 원망스럽지만, 시장에서는 미루고 미뤄 온 구조개혁이 결국 고환율을 불러왔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 저하, 인구구조 등 우리 경제의 부정적 요인들이 1500원에 육박한 환율로 귀결됐다는 얘기다. 정치 리스크가 불거지기 전에도 환율은 불안한 흐름을 보여왔다.
최근 한은은 구조개혁으로 저출산, 혁신 부족 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2040년대부터는 0%대로 내려앉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경고를 내놓기도 했다. 부디 새해에는 늦기 전에 구조개혁의 포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1500원의 공포에서도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더 나아가 한은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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