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조직과 회사도 단 ‘한 명’ 때문에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다. 233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영국 베어링스 은행이 그랬다. 손실을 은폐하며 무모하게 거래하던 직원 ‘한 명’ 때문에 1995년 파산했다. ‘팻핑거’ 같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거짓을 거짓으로 덮다가 일을 키웠다. 하물며 그 ‘한 명’이 한 나라의 리더라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거듭된 오판과 욕심으로 휘청이고 있다.
비상계엄의 무모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경제사령탑이 대통령, 국무총리 직무에 더해 재난 총괄까지 맡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초인이 아닌 이상 경제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처럼 대행의 대행의 순서가 어디까지 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분간은 정치에 뭔가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새해 첫날이지만 기대와 희망보다 불안과 좌절이 짓누른다.
정치 실종에 자력구제 나선 기업들
새해 사업 계획을 준비하는 기업들은 ‘시계 제로’ 상태다. 보호주의가 득세하고 첨단산업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홀로 광야에 내던져진 꼴이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경제 외교와 산업 정책이 중요한 시점에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대변할 정부가 없다. 우리는 인질로 잡혀 있다”고 외신에 호소한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은 처절하게 들린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천장을 뚫고 올라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보고 있다. 지난해 주식시장은 남들이 20, 30%씩 오를 때 홀로 10% 가까이 뒷걸음질쳤다. 소비심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악이고, 기업경기는 부정적 전망이 역대 최장인 34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8년 전 탄핵 때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란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대 주력산업 모두 하나같이 위태롭다. 정치 불안으로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프랑스가 남의 일이 아니다.
정부와 정치에 기댈 수 없는 기업들은 ‘경제 외교관’을 자임하며 한국 경제를 지키려 자력구제에 나서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세계 각국에서 서한을 보내 “한국 경제는 건재하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맨 처음 만난 것도 한국 정부 인사가 아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트럼프 당선인 앞에서 “한국은 저력 있는 나라이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다시 한 번 ‘기업가 정신’ 불 지필 때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안정에 방점을 두면서도 미래 성장을 위한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로봇 전문기업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하며 로봇 경쟁에 참전을 선언했다. 현대차그룹은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하는 등 트럼프 2기 대응을 위한 진용을 새로 꾸렸다. 4대 그룹은 지난해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도 영업이익을 웃도는 규모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에 선제적으로 투자했다. 비주력사업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고, 미래성장동력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조선, 에너지, 원전, 방산 등의 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미증유의 국난을 이겨 온 데는 수출을 앞세워 세계 시장을 열어 온 기업들의 역할이 컸다. 절망과 폐허에서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단체장들이 올해 신년사에서 하나같이 기업가 정신을 재점화하겠다고 각오를 다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깜깜해 보이지만 기업이 앞장서 끌고 국민이 함께 밀면 지금의 위기도 보란 듯이 극복할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