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강연 도중 한강 작가가 소설 ‘소년이 온다’ 집필 계기에 대해 밝혔다. 이 대목에서 그는 ‘사진’을 4번 언급한다. 12세에 본 이 사진들이 지우기 힘든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사람은 오감으로 공포를 체감하고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그중 시각 경험이 가장 클 것이다. 시각 정보가 가장 빠르게 뇌에 입력되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해도 사진이나 영상을 본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 나 또한 대학 입학 후 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 영상(위르겐 힌츠페터 당시 독일 ARD방송 기자가 찍은 비디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집단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사진기자 사회에도 트라우마가 있다. 선배 사진기자들에게 들은 1980년 신군부의 보도 지침은 간접 체험만으로도 늘 섬뜩한 상처였다. 그런데 44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3일 발표된 ‘계엄사 포고령’의 세 번째 항목도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였다. 기사는 물론이고 사진까지 모두 검열을 받으라는 뜻이다. 역사적 기억이 소환되며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국회를 취재한 사진기자들도 큰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집단 트라우마가 있다. 최근 50년간 큰 상처들만 짚어 봐도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90년대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외환위기 사태 등이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침몰 순간이 방송으로 생중계돼 온 국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시대다. 최근 이태원, 제주항공 참사가 그랬고 계엄군의 국회 난입이 그러하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특전사 등 계엄군이 쭈뼛거리는 모습과 흔들리는 눈빛이 실시간 시각 정보로 공개됐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아니라 내적 갈등을 겪는 개인들이 보였다. MZ(밀레니얼+Z)세대가 대부분인 이들도 영상에 친숙하다. 현장에서 촬영되는 영상들이 시각 기록으로 영구 박제될 것임을 인지했을 터다. 이들에게 2024년의 계엄 동원은 치욕스러운 트라우마로 평생 남을 것이다. 당사자에게 트라우마는 막연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절박한 현실이다.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트라우마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 중 하나로 해당 사건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직시’해 ‘대면’하게 돕는 인지행동치료를 꼽는다. 눈을 부릅뜨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예술로 마음을 치유하는 기법 중에도 사진을 통한 치유가 있다. 음악 미술 연극 치유처럼 사진 작업을 통해 트라우마를 조금씩 어루만진다. 사진 치유의 핵심도 ‘직시’와 ‘대면’이다. 상처와 고통을 눈으로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의 병을 낳은 장소나 대상을 찾아 직접 마주하고 이를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치유에 조금씩 도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상처를 직시하며 카메라로 시각의 기억을 대신 기록해 용기를 얻는 방법이다.
2019년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 ‘나는 간첩이 아니다’ 사진전이 대표적이다. 1970, 80년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끔찍한 고문의 기억이 있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직접 촬영했고, 이를 모아 공동 사진전까지 열었다. 2014년엔 5·18 당시 시민군 생존자들이 광주에 있는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찾아 이를 마주하고 사진을 찍으며 서로 위로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로 30년 넘도록 이곳에 오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첫걸음이 중요했는데, 카메라가 1차 가림막 역할을 했고 뷰파인더가 2차 필터가 돼 줬다고 한다. 카메라가 보호막이 된 것이다. 이후 3, 4차례 더 방문해 사진을 다양하게 찍으며 그 공간과 소통했다고 한다. 공포와 모멸이 사라지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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