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학한림원 윤의준 회장
韓기업들 기업가정신과 혁신 부족… 세계 최고가 되려는 분위기 없어
반도체 지원은 ‘대기업 특혜’가 아냐… 국가적 지원 안하면 산업공동화 우려
대학은 질문할 줄 아는 학생 길러내야… 한국은 AI 경쟁력과 잠재력 보유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와 기술 개발 투자를 더 높일 것입니다. 결국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지겠죠.”
1일 취임한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65)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중 제재가 이어지는 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며 “우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에 지원을 안 하면 자칫 산업공동화 현상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윤 회장은 화합물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화합물 반도체는 두 가지 이상 원소로 만들어진 반도체로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전력 효율과 특성이 좋아 요즘 첨단 분야에서 수요가 늘고 있다. 그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 분야의 원천 특허도 다수 갖고 있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자재료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교수, 연구처장 및 산학협력단장,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 등을 지냈다.
1995년 설립된 한국공학한림원은 공학 분야에서 기술 발전에 공을 세운 공학기술인들이 모인 단체다. 공학 분야 석학 및 관련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661명(정회원은 288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학기술 분야에서 정부에 정책 제언을 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다음은 윤 회장과의 일문일답.》
―중국과 일본 등에 비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수출경쟁력이 중국에 이미 뒤처지고 있다. 2024년 1∼8월 첨단산업의 무역특화지수를 보면 한국은 25.6, 중국은 27.8로 중국이 앞서고 있다. 특히 10년 전인 2014년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지수는 4.3포인트 하락한 반면, 중국은 16포인트 상승했다. 물론 한국이 아직 앞서는 분야도 많다. 조선업에서 한국은 세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기전자 산업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치열한 경쟁 구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빠른 추격과 일본, 대만의 기술력에 대응해 지속적인 혁신과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혁신의 부족’이다. 과거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많은 성과를 냈지만, 현재는 생산성과 경쟁력이 함께 약화되고 있다.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대-중소기업 간 불균형 심화로 인한 비즈니스 생태계 저하, 혁신의 부재, 그리고 기업가 정신 약화로 인한 인재 부족 등…. 우리나라의 혁신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기업가 정신과 혁신이 부족해진 이유는 뭔가.
“주요 대기업들을 보면 예전처럼 ‘죽기살기’로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 같지가 않다. 세계 최고가 되고자 하는 분위기라든가, 추진력, 결기, 이런 게 없어 보인다. 주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엔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규제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한창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근무시간 채웠다고 컴퓨터 끄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현실에 안 맞는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면 과거 한국의 반도체가 세계로 쭉쭉 뻗어 나가는 시대엔 공대에서 제일 잘 하는 학생들이 전자공학과를 가고 최고 인재들이 기업에 모였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그쪽에 비전이 있을까’ 하며 주저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부나 정치권의 반도체 산업 지원은 부족한 게 많다.
“아직도 ‘잘나가는 대기업을 왜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느냐’, ‘왜 수도권에 지원을 몰아주느냐’는 심리가 이들에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도체는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영역으로 보면 안 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해 미래 산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산업인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만 ‘민간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승산이 없을 것이다. 자칫 그러다가 국내 산업 공동화가 올 수도 있다. 다 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겠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제재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기술적 발전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중국은 미국의 제재를 견디기 위해 자체 반도체 기술 개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 것이고 이로 인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우리에게 반사이익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대중 제재로 중국의 추격이 단기적으로 주춤할 수 있다. 그 사이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반도체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로 반도체 업계에 보조금, 세제 혜택, 인프라 구축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가 기술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반도체특별법은 계속 국회에서 공전하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한 법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기업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와 관련된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법이다. 반도체 없는 한국은 상상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자동차, 조선, 정보통신 등 타 산업의 경쟁력 확보의 근간이다. 반도체 산업을 지키자는 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의 기술력은 우리를 바짝 추격해 와 있고, 미국 일본 등 선발국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기술을 사업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서 멈춰져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지금 정치권은 산업계의 목소리를 믿어야 할 시기다.” ―우리나라에 ‘제2의 엔비디아’가 안 나오는 이유는 뭔가.
“아직 창업 생태계가 안 갖춰져 있다.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VC)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VC는 실리콘밸리 VC에 비해 아직 진짜 ‘모험 자본’이라 할 만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시리즈 A∼C’(투자 유치 단계)까지 기업이 수익을 내지 않아도 다 기다려주며 기업의 성장을 도와준다.”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줄고 의대 선호 경향까지 있어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학생들에게 반도체 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홍보하면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인력 부족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의 반도체 산업을 계속 성장시켜야 한다. 성장을 통해 늘어난 기업의 이윤이 근로자에게 돌아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직업안정성과 보수가 높아지면 반도체 선호 경향, 이공계 선호 경향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반도체 관련 스타트업들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반도체 인프라를 이용해서 반도체 관련 창업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젊고 패기 있는 기업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는 시점이며 인공지능용 반도체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엔비디아, TSMC 아성에 도전하는 기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엔비디아의 독점을 깨기 위한 새로운 수많은 도전자 중에 한국 스타트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산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기존 대학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전 세계 유명 교수의 강의가 다 공개돼 있고, 인공지능에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 역량을 길러줘야 한다. 질문을 할 줄 아는 학생,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남보다 먼저 찾을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학부생 교육이 단순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에서 프로젝트 기반 학습 방법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기업, 연구실 인턴십을 하도록 해서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문제 해결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체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은 창업 혁신의 거점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학의 우수한 인적·물적 인프라를 활용해 스타트업과 중소벤처 성장 생태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AI 경쟁력은 어떠한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고 상당한 잠재력도 있다고 본다. AI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전 세계적으로 중상위권에 속해 있다. 영국의 데이터 분석업체 토터스 미디어에 따르면 한국은 글로벌 AI 국가 역량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거대언어모델(LLM)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이 AI 분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AI 산업 발전을 위한 인프라 투자, 인력 양성, 국제협력 등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법제도와 규제 개선도 필요하다. 또 인재 유출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도 필요하다. 지속적인 투자 확대 또한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제조업에 AI를 도입하여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공학한림원의 역할을 어떻게 변화시킬 생각인가.
“올해로 한국공학한림원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일단 회원제도를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현재는 대기업과 주요 대학의 석학들이 주로 회원으로 돼 있는데 그 문호를 넓히려 한다.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니콘 기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 기업과 기업인들이 공학한림원에 참여해 함께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 의견을 나눠야 한다. 이를 위해 보다 젊고 역동적인 유니콘 창업가, 중소중견 기업인, 여성 공학인들을 새로 맞이하려 한다.”
윤의준 회장(65)
△1983년 서울대 금속공학 학사 △1985년 서울대 대학원 금속공학 석사 △1990년 MIT 전자재료 박사 △1985∼2020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2011∼2013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 △2013∼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 주력산업MD △2019∼2021년 서울대 연구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2020∼2023년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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