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민과 세계가 지켜본 5시간 반… 부끄럽고 창피하지 않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3일 23시 30분


3차례 출석 거부로 영장 자초한 尹
200명 ‘인간방패’ 뒤에 숨어 ‘관저 농성’
“법적 정치적 책임회피 않겠다” 약속 지켜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도로가 차량과 경호처 관계자들로 막혀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도로가 차량과 경호처 관계자들로 막혀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3일 오전 국내외 언론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들어갔다가 5시간 반 만에 철수했다. 이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TV 화면을 통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벌어진 윤 대통령 체포조와 경비 병력 간 팽팽한 대치 상황을 지켜본 국민들은 한 달 전 중무장한 병력이 여의도 국회에 난입했던 계엄의 밤처럼 불안감과 착잡함을 느꼈을 것이다.

공수처는 이날 경찰 특수단 120명 등 총 150명의 체포조를 투입했고 경찰도 체포영장 집행 과정에서의 충돌에 대비해 관저 주변에 2700명이 넘는 경력과 버스 135대를 배치했다. 이들은 관저 앞 200m까지 뚫고 들어갔으나 경호처가 버스와 승용차로 세워놓은 차벽과 관저 경호부대 및 경호처 직원 200여 명에 가로막혔다. 영장 집행 과정에서 우리 공권력 간에 물리적 충돌 사태라도 벌어졌다면 어쩔 뻔했나.

미국 CNN, 영국 BBC를 비롯한 해외 취재진도 동틀 무렵부터 한남동 관저 앞으로 몰려와 “서울에서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며 윤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 시도 현장을 실시간 속보로 전했다. 일본 주요 언론도 자사 홈페이지 화면 머리기사로 체포 시도 현장을 소개했고, 영국 가디언은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stop the steal(부정선거를 멈춰라)’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도했다.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모범 사례로 꼽히는 나라에서 어쩌다 현직 대통령 체포를 놓고 공권력이 대치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일까지 벌어진 건지, 마치 부정선거가 횡행하는 나라처럼 비치게 된 건지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이제 대통령 관저 앞은 국론 분열의 상징이 됐다. 1차 체포 시도가 불발된 후 관저 앞 대통령 찬반 집회 규모는 불어나고 분위기도 험악해지고 있다. 관저 안팎에서 벌어지는 대치에 국민들은 예기치 않은 불상사라도 벌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지만 윤 대통령은 여전히 ‘관저 농성’ 중이다. 이날 체포 시도에 대해서는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가 안하무인으로 설친다”고 했고, 경찰 기동대가 수사 업무에 가담한 것은 불법이라며 “엄중 경고”까지 했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불법적 행태를 보이고선 오히려 공수처와 경찰을 비난하며 겁박하다니 적반하장 아닌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이라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건 그동안 공수처의 세 차례 출석 요구를 모두 거부한 윤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윤 대통령은 내란죄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공수처가 체포영장을 청구한 것이나, 이를 법원이 발부한 것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원이 공수처의 수사권을 인정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이상 이에 응해야 하는 것이 법이 정한 절차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통령이 경호 인력 뒤에 숨어 법질서를 유린하고, “함께 끝까지 싸우자”고 선동하며 지지자들까지 방패로 내세웠다.

집권 여당은 대통령을 설득해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수사기관과 법원 탓만 하고 있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 시도는 부당한 행위”라면서 “공수처와 정치 판사의 부당 거래”라는 말도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법원을 비난하는 게 여당 대표가 할 말인가.

공수처는 “경호처 공무원들의 경호가 지속되는 한 영장 집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경호처로 하여금 체포영장 집행에 응하도록 명령할 것을 강력히 요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신병 확보가 지연될수록 불확실성만 커질 뿐이다. 이미 외신들은 “한국의 정치 위기는 국회의 탄핵안 가결 후에도 그 기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리더십 공백 장기화가 한미 동맹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치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재로선 악화 일로의 위기를 평화롭게 수습하는 길은 윤 대통령이 “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방법밖에 없다. 소환에 불응하고 체포영장을 거부한다고 언제까지 법의 집행을 피할 수 있겠나. 지난 연말엔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되더니 이젠 정당한 체포영장 집행에 경호원들을 앞세워 버티는 ‘막장극’까지 연출하나.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가.


#공수처#내란죄#체포영장#윤석열#경호처#관저 농성#국론 분열#정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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