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1924∼2024·사진)의 본명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입니다. 하지만 생전에 애칭인 ‘지미’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조지아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터 전 대통령은 조지아공대를 졸업한 뒤 7년간 해군에서 복무했습니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한 그는 2년 뒤 재선에도 성공해 1970년에는 조지아주 주지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인종차별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흑인과 여성에게 주 공무원직을 개방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76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혼란에 빠진 미국 정치 상황에서 신뢰 회복을 내세우며 제39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재임 중 그는 냉전, 에너지 위기, 이란 인질 사태 등 복잡한 국제 및 외교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해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으며, 1980년 미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과 7.5%의 실업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임기 초 75%를 웃돌았던 그의 지지율은 임기 말 곤두박질쳤고,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 전 대통령은 히스패닉계 최초 등용, 여성 인권 증진, 친환경 에너지 지원 정책, 미 국무부 내 민주주의·인권·노동국 신설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국제 외교 측면에서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 협정을 끌어낸 것이 높이 평가됩니다.
퇴임 후 그의 활동은 더욱 돋보였습니다. 1982년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을 목표로 설립한 카터센터는 국제원조기구 등을 통해 질병 퇴치와 농업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했습니다. 또한 민간 외교관으로 전 세계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니카라과 미스키토 인디언의 귀환을 도왔고, 파나마의 불법 투표를 감시했으며, 에티오피아에서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세력과의 협상을 중재했습니다.
한국과도 인연도 깊습니다. 그는 1994년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로 불거진 ‘1차 북핵 위기’ 당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고, 2010년에는 미국인 억류 사건 해결을 위해 북한을 찾았습니다. 2011년에도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지난해 12월 29일(현지 시간) 고향 조지아주에서 100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9일 치러집니다. 이날은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돼 모든 연방 기관이 문을 닫고 뉴욕증시도 휴장합니다. 그는 재임 때보다 퇴임 이후 더욱 존경받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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