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살찌웠던 청어[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24〉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7일 23시 00분


“예전에는 투박하고 거칠고 성긴 어구에도 물고기가 잘 잡혔다”라는 내용을 담았던 지난번 칼럼(123회)을 읽은 지인이 질문을 해왔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잡힌 어종이 뭐냐는 물음이었다. 청어 명태 조기 대구가 조선 시대 주요 어종이었고, 그중에서 청어가 으뜸이었다고 답했더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수긍할 때까지 한참을 설명했다. 청어는 중요한 물고기였기에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명물기략’(1870년)에서는 청어가 값싸고 맛이 있어 가난한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비유어(肥儒魚)’라 했고, ‘백운필’(1803년)에서 청어는 값싸고 흔한 생선이어서 해주로부터 청어가 들어오면 한강의 여러 포구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가난해서 고기나 생선을 먹지 못하던 유생도 생선 맛을 볼 수 있어 ‘유어(儒魚)’라 한다고 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19세기 초)에서는 속담에 “가난한 백성에게 청어가 없다면 어떻게 나물 반찬 신세를 면하랴” 했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시장에 막 나오면 값이 제법 비싸도 잠깐 사이에 다 팔렸고, 10전도 채 되지 않아 바닷가 사람들은 청어죽으로 밥을 대신했다고 한다. 이색은 그의 시에서 “서해의 청어, 값싸구나” “매 끼니를 청어가 돕는다”라고 하여 고려 시대에도 청어를 일상으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기에 이런 표현을 썼을까. 청어는 다른 어종에 비해 풍흉의 기복과 어장 이동이 심했으나, 명태와 더불어 가장 많이 잡혔던 물고기로 꼽힌다. 조선 시대에 한반도 전 해역에서 대량으로 어획된 유일한 어종이 청어였다. 가을·겨울은 함경도, 한겨울은 강원도와 경상도, 봄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늦봄·초여름은 황해도에서 잡혔음을 서유구(‘난호어명고’), 이규경(‘오주연문장전산고’), 이익(‘성호사설’) 등 수많은 사람이 증언하고 있다.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서 점차로 한강에 이르렀고, 원래 요동의 바다에는 없던 청어가 갑자기 나타나자, 이를 ‘신어(新魚)’라 불렀다”고 류성룡은 ‘징비록’에 썼다. 이런 현상을 이수광, 이관명 등 유학자들도 앞다퉈 기록했다. 청어의 이동 경로가 넓어진 원인을 수산학자들은 소빙기에서 찾고 있다. 한랭해진 기후는 해수 온도의 하강을 초래했다. 특히 기온 하강이 극심했던 17세기에 연해주 한류(寒流)의 확장은 한류성 어종인 청어가 서해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서유구는 4월 중에 수만 마리가 물결에 떠서 다니므로 낚시질하거나 그물질하지 않고서도 잡을 수 있다고 했고, 정약전은 청어 떼 수억 마리가 대열을 이뤄 바다를 덮을 지경이라고 했다. 청어는 바다의 개미로 불릴 정도로 번식력이 왕성한 물고기다. 청어 떼의 엄청난 규모는 북대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2세기 말 덴마크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당시 알을 낳으려는 청어가 스코네 근해로 바글바글 몰려들어서 노를 젓기도 힘들 지경이었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엄청나게 잡히던 청어는 1870년대 말 황해도에서 감소하기 시작했고 1890년대에는 서해에서 자취를 감췄다. 주요 어장은 동남해와 동해로 축소됐고, 1910년을 전후로 경북 포항 영일만 근해로 어장이 대폭 줄었다. 그 대신 멸치와 정어리가 총어획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잡혀서 청어의 빈자리를 메웠다.

#백성#살#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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