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어라”는 결국 “잘 살아라”는 응원[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9일 23시 00분


고수리 에세이스트
고수리 에세이스트
바닷마을에서 자란 나는 해마다 바다에 뜨는 해를 보며 나이를 먹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은 세월이랑 사랑 같은 걸 ‘먹는다’고 표현했다. 가만있어 보자. 해가 얼마나 먹었나. 갸가 벌써 그래 나이 먹었드나. 말린 생선 가가 꿔 먹어라. 참으로 귀한 거라 얼라들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잖니. 그리도 정답게 건네는 ‘잘 먹었냐’는 물음이 내게는 ‘잘 지내냐’는 인사로 느껴졌다. 잘 먹고 잘 지내라고. 염려하고 돌봐주는 푸짐한 마음들을 꿀떡꿀떡 받아먹으며 나는 살이 찌고 키가 크고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인가. 내게는 세월도 사랑도, 침이 고이고 뱃속이 따뜻해지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다.

새해에는 일찍이 언덕에 올라 해돋이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가르며 하늘로 헤엄치듯이 두둥실 떠오르던 해. 새빨개지는 해를 따라 세상도 밝고 따뜻해졌다. 저 작은 동그라미로부터 세상이 이리도 환하게 데워진다니. 해를 한입에 꿀꺽 먹어 보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뱃속이 울렁울렁 따뜻해지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고향에 가지 못했다. 가족이 아파서 병원을 오가느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연말을 보냈다. 간호로 미뤄둔 작업을 해내며 잠도 밥도 대충 챙기고 연신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허기를 채우려 나선 길에 칼칼한 짬뽕이 생각났다. 어째서 심란할 땐 매운 음식이 당기는 걸까. 실은 연달아 매운 것만 먹은 터라 속이 쓰렸지만, 단골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포장주문했다. 휴대폰을 보며 기다리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누룽지 좋아해요?”

“네에?” 이어폰을 빼고 되물었더니 아주머니가 입을 뻐금거리며 “누룽지” 하고 말했다. 뜬금없는 귀여운 단어에 웃음이 났다. “어유, 없어서 못 먹죠.” 그러자 아주머니가 뜨끈한 봉지를 쥐여 주며 말했다. “누룽지 좀 가져가. 만날 매운 것만 먹으면 탈 나. 폭 끓여다가 숭늉 해 먹어요. 속이 참 따뜻해져.” 얼떨결에 짬뽕이랑 누룽지까지 받아들고 가게를 나서는데 아주머니가 인사를 했다. “복 많이 받아요.” 주머니 속에 만져지는 누룽지가 핫팩처럼 뜨거웠다.

새해부터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속이 쓰리고 온몸이 욱신거려서 밤새 앓았던 사람 같았다. 해돋이도 못 봐 새해답지 않은 아침, 나는 비척거리며 주방으로 가 누룽지를 팔팔 끓였다. 한소끔 식혀 그릇에 담았다. 말간 물을 휘젓자 밥알이 눈처럼 휘돌다 가라앉았다. 따뜻한 숭늉을 한 모금 떠먹었다. 아. 살 것 같다. 온순한 기운이 속을 달래 주었다. 새해에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설렜는데 이번은 달랐다. 잠잠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랄까. 앓고 난 후 회복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나는 탈이 났던 모양이다.

미음을 먹듯 숭늉을 떠먹었다. 밥알을 오물오물 달게 씹어 먹었다. 이렇게도 나이를 한 살 먹는구나. 제법 나이를 먹어 보니 알게 되는 것들. 세월도 사랑도 복도 잘 먹어야지. 지친 속을 챙기며 탈 나지 않게 보살펴 먹어야지. ‘잘 먹어라’는 말이 ‘잘 살아라’는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창밖에는 해가 떠 있었다. 어느새 마음이 밝아지고 속이 참 따뜻했다.

#인생#응원#고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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