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총선이 보름도 안 남은 3월 말. 윤석열 대통령은 여권의 한 인사에게 텔레그램을 보냈다. “한일관계 정상화, 화물연대 대응, 민노총 건폭 혁파, 노조회계 투명화, 사교육 카르텔 혁파, R&D 혁신 구조조정, 늘봄학교 추진….” 그는 자신이 성과라고 생각한 일곱 가지를 나열한 뒤 여덟 번째로 “의료개혁 의사 증원”을 거론했다. 그러고선 “모두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국익과 국민만 보고 추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권 인사는 의대 정원 증원 문제는 선거 뒤 원칙대로 가는 방법도 있으니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취지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런 식으로는 (선거) 못 이겨요. 신문 보지 말고 민심을 들으세요.” 돌아온 건 윤 대통령의 짜증 섞인 답글이었다. 놀란 그가 “죄송하다”고 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치지 않았다. “보수언론의 권력 지향 행각과 왜곡 선동이 도를 넘었지만 일반 민심을 봐야 한다”는 강변을 이어갔다. 비판에 귀 닫은 시대착오적 언론관
윤 대통령은 이 발언으로 시대착오적 언론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의대 정원 증원 규모를 2000명으로 못 박은 근거의 빈약함, 결정 과정의 절차적 문제, 교수도 시설도 확보하지 못한 여건을 조목조목 지적했던 언론의 비판이 왜 왜곡 선동인지 근거를 알 수 없다. 보수언론이라는 규정도 모호하지만 보수언론이라면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마저 진영 대결과 정파적 이해관계의 셈법으로 적대시한 윤 대통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합리적 비판에 귀를 닫은 채 정보를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윤 대통령 임기 내내 참모들은 비판 기사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경질적이고 적대적이었다. “당신들과 통화하다 감찰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참모들의 행태는 왜곡된 윤 대통령 인식의 투영이었던 셈이다.
윤 대통령은 민심을 들으라 했다. 그가 말한 민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권 인사에게 물었다. 그는 “극우 유튜브”라며 극우화는 예정된 코스였다고 했다. 지난해 초부터 극우 유튜버들의 영상 링크를 공유하며 자신의 생각과 정말 맞는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 관련 언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도 3월 말∼4월 초였다.
그의 이런 인식은 총선 직전 4월 초 담화로 그대로 이어졌다. 2000명 증원의 정당성을 강변한 그 담화의 초안은 훨씬 강경했다고 한다. 국민의힘마저 놀라게 한 그 담화는 김건희 여사 디올백 수수 의혹, 이종섭 주호주 대사 임명 논란과 함께 여당의 총선 참패를 가져온 오만과 불통의 대표 사례였다. 극우의 좁은 대롱으로 만든 허상의 적
하지만 극우 유튜브라는 ‘좁은 대롱’으로 본 세상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윤 대통령은 참패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부정선거 탓이라는 망상에 빠졌다.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가짜뉴스 척결”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이 진짜이고 민심이라 믿은 그 내용이 음모론 수준의 가짜뉴스임은 깨닫지 못했다. 참패 책임을 돌리려 허상의 적을 만들었으니 실체가 불분명한 반국가 세력이고 중앙선관위였으며 언론이고 자신을 비판한 정치인들이었다.
극우라는 좁디좁은 세계로 걸어 들어간 그는 그 안에 스스로 갇히는 ‘자발적 유폐’를 택했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한남동 관저에 자신을 가둔 지금 상황과 오버랩된다. 대공황에 대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이제까지 내가 만든 적이 누구인지 보고 나를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만들어낸 허상의 적을 보고 우리가 그에 대해 내릴 평가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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