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박힌 사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83〉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10일 23시 06분


못 박힌 사람은
못 박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네가 못 박았지
네가 못 박았다고

재의 수요일 지나고
아름다운 라일락, 산수유, 라벤더 꽃 핀 봄날
아침에 떴던 해가 저녁에 지는 것을 바라보면
못 박힌 사람이 못 박은 사람이고
못 박은 사람이 못 박힌 사람이고
못 자국마다 어느 가슴에든 찬란한 꽃이 피어나고 있는데

못 박힌 사람이
못 박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듯이
못 박은 사람도 못 박힌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하략)

―김승희(1952∼ )


보드라운 아이를 품에 안고 너무 행복해서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해야지, 기억해야지 되뇌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행복은 꿈과 같다. 잡아두고 싶어도 금세 달아나 버린다. 나쁜 기억은 반대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해도 잊히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나쁜 말은 수십 년이 지나도 어제인 듯 생생하다. 그 사람은 이미 잊었을 텐데 나만 기억하는 불평등이 퍽 분하다. 사람에게 고통의 기억은 참 질기다.

그래서 새해의 다짐으로 이 시를 골랐다. 못 박힌 사람은 못 박은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가엾고 불행하다. 맞지, 맞는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자기 가슴을 내려다본다면 거기 못에 박혀 너덜너덜한 상처가 보일 것이다. 고요한 1월에는 정성 들여 그 못을 빼고 못 뺀 자리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 더불어 1월로 시작되는 올해의 모든 달에는 남에게 못 박지도 못 박히지도 않고 싶다. 너는 판단도 평가도 못 하는 비겁자냐, 이런 비판을 듣는다고 해도 남에게 꽂힐 못이라면 던지고 싶지 않다. 말이 비수처럼 꽂히면 그렇게 아프더라. 못질은 액자를 걸 때만.

#못 박힌 사람#김승희 시인#기억#새해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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