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中 상인 정착하기 시작… 택시-부동산까지 진출해 재산 불려
강점기 때 中 하층노동자 유입… ‘중국인 거리’ 서소문정 ‘마굴’ 오명
싼 일자리 놓고 조선인과 경쟁… 결국 ‘만보산 사건’으로 민족 충돌
《1931년 반중 폭동 왜 일어났나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바로 그들 중국인과 인접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뙤놈들’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쿠리,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을 내어 형님도 한 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덩어리였다.” 소설가 오정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국인 거리’의 한 구절이다.》
6·25전쟁 직후 인천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당시 여러 대도시에 존재했던 ‘차이나타운’(화교 사회)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온 것이었다. 경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성에 중국인이 거주한 연원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때 청계천 수표교 부근에 20여 호의 중국인이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개는 상인이었다. ‘경성부사’ 제3권에 따르면 청일전쟁 직전(1893년)의 기록상 경성에 일본인은 780명 정도인 데 반해, 중국인은 이미 수천 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중국인이 증가하면서 큰 음식점도 여럿 생겼다. 1932년 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는 ‘경성 명소’라는 전면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서원(雅敍園)과 봉래각(蓬萊閣)을 명소 중 하나로 소개한다. 황금정(을지로)과 명치정(명동) 등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유명 중국 음식점들이다. 아서원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한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그 밖에도 다양한 역사적 모임이 있었던 곳이다. 광복 후에도 1970년대 초 문을 닫을 때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중국 음식점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국인의 기세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하면서 다소 꺾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대(大)상인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이들은 주로 중국영사관(현재 주한 중국대사관 자리)이 있는 명치정과 인근의 수표정, 관수동 등지를 근거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광둥 출신 담걸생(譚傑生)이 창업한 무역회사 동순태(同順泰)를 들 수 있다. 동순태는 1892년 청나라의 차관을 중개하고 조선 정부로부터 여러 특혜를 얻어 크게 도약했다. 한강 항행권을 취득해 인천과 한성을 오가는 중국 상인의 화물을 독점 취급했다. 병합 이후에는 사업 범위를 다각도로 넓혔다. 황금정에 미카도택시회사를 설립해 교통업에 뛰어들었다. 전성기 미카도는 경성 택시의 약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도심 곳곳에 토지를 취득하여 부동산 임대업도 벌였다. 1923년 말 현재 경성 시내 담걸생 소유 토지는 8626평이나 되었다(동아일보, 1923년 12월 11일). 현재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 일대인 명치정 2정목에 위치한 동순태 본점은 부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924년 유력한 일본인 대부호들을 제치고 경성의 개인 납세액 1위였던 데에서도 담걸생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4년 7월 4일).
병합 이후에는 새로운 부류가 부상했다. 총독부 조사 자료는 “지나인(支那人·중국인)으로 보면 여러 계급의 사람이 건너오고 있다. 경성에도 굴지의 대상인이 있는가 하면 계절성 노동자도 자못 많다”고 했다(조선총독부 ‘조선에 있어서 지나인’, 1924년). 중국인 사회도 계층적으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경성에는 총인구 39만4240명 중 약 2%인 8275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기타 외국인 수가 총 461명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제외한 경성의 외국인은 거의 모두 중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구 구성이 극단적인 남초라는 점이다. 약 87%인 7209명이 남성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많은 수의 중국인이 단신 이주한 노동자였음을 반영한다. ‘화공(華工)’이라고 불린 중국인 노동자는 주로 도심 서남부 변두리에 많이 살았다. 앞서 이주한 상인 중심의 재력가들과는 근거지가 구분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동네가 서소문정이다. 1930년 서소문정의 총인구는 2691명인데, 이 중 중국인은 1622명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소문정은 말 그대로 ‘중국인 거리’였다. 당시 이곳의 모습은 어땠을까?
“서소문정 거리를 지내면 허릴업시 그들의 번국 어느 하층 사회를 걸어가는 감이 있다. 그들의 집에 들어가면 나올 길을 못 찾아 나올 것도 같은 생각이 든다. 서소문정은 아편굴이 많기로 서울서 독특한 곳이니만치 석양 때나 밤늦게 혹은 새벽녘에 헌털뱅이 입은 걸인이나 아래 위 말숙하게 휘감은 사람, 특별히 얼굴이 누렇고 목허리 굽은 사람들이 왕래를 흘끔흘끔 살펴보며 우중충한 옆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 그것이 모두 아편쟁이에 틀림없다. 지나인의 밀매음녀도 잇는 듯하다. 아무리 지나인의 원풍속을 모른다 해도 핏기운 없는 얼굴에 어디로 보든지 음탕한 포스를 하고 희미한 전등빛에 우울한 표정, 유혹적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별 수 없는 매음녀다. 거리에 나서서 외입쟁이 낚시질을 하는 것도 같다. 무엇에서 무엇까지 그들의 거리는 음침하고 우중충하고 마굴과도 같은 기분이 돌고 그들의 말소리나 음흉한 음성은 어디로 보든지 음모적 민족이다.”(별건곤 ‘대경성의 특수촌’, 1929년 9월호)
마약, 사창가 등 매우 어두운 이미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1923년 동아일보는 서소문정, 태평통 2정목 등 중국인 밀집 지역을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실었는데 제목부터 ‘날신귀(剌身鬼·마약 중독자)가 모여드는 마굴(魔窟) 탐방기’다. ‘마굴’ 이미지는 중국인이 어린 조선 여성을 납치, 감금하고 팔아넘긴다는 ‘소문’으로 더 강화되었다.
“요사이 음흉한 중국 사람들의 마수에 걸리어 멀리 산설고 물설은 중국땅으로 우리 조선 여자들이 많이 팔려간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중략) 서소문안과 태평통 일대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할 뿐더러 그 자들은 거의 모루히네나 아편을 먹는 자들로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미한 점이 많은 까닭에 서대문서에서는 특히 주목을 하는 모양이라더라.”(동아일보, 1924년 9월 28일)
중국인, 그중에서도 하층민 사회의 ‘악마화’는 큰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 이 사건으로 희생된 조선인은 없었지만, 200여 명이 살해당했다는 오보가 났다. 이를 계기로 경성, 평양, 인천 등지에서 격렬한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났다. 경성에서는 7월 3, 4일 폭동으로 중국인 146명이 부상을 당하고 65만여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이들의 직업을 보면 잡화상, 점원, 일용 노동자, 각종 직공 등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 노동시장에서 화공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당시 중국인 노동자는 조선인에 비해 평균 임금이 훨씬 낮았다. 따라서 중국인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중국인을 배척하는 것은 민족 감정이 아니라 생존권의 자위를 위하는 일면”으로 합리화되었다(조선일보, 1925년 4월 3일).
중국인 동네가 곧 마굴이라는 이미지의 지속적인 재생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으며, 1931년 반중국인 폭동은 예견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에서 도시 하층민 사회의 형성과 노동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조중 민족 간 갈등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화교들이 제일 미워하는 인물이 박정희다 그들을 재산을 전부 부정했으니 당시 화교들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재산땅을 맡겻는데 그들이 전부 통수치구 지들이 꿀걱했다 그러니 할아버지 아버지에 들은 얘기를 통해 가장미워하는게 박정희다 그딸 박근혜 또한 밉고 그들이 대거 박통탄핵때 나왔다는말이다 화교에 대한 특혜가 만아지면서 그들이 다시 준동하고 있다 강력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중공과 내통하는 화교 그들이 간첩법을 방해하고 있다 나 잘알던 중국화교아재는 강택민이 한국에 왔을때 같이 사진 찍고 자랑스러워 했다
2025-01-16 11:10:38
그리고 박정희 이후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식당이나 운영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삥뜯기고 재산을 갈취당한 슬픈 역사를 들었다 이젠 이들이 우리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대는 것이다
2025-01-16 10:57:19
'그 때, 화교들이 인천, 서울 서대문구에 정착해 몇 세대를 거치고 점쟎게 식당이나 건물주가 된 것과 판이하게 서울 구로, 대림동 일대는 중국인들이 '러시아인들', 조선족들과 경쟁하며 함께 조직 폭력까지 일삼는다', 아마 후자쪽 오류, 왜곡된 견해가 압도적인 상태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죠.
그리고 박정희 이후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식당이나 운영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삥뜯기고 재산을 갈취당한 슬픈 역사를 들었다 이젠 이들이 우리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대는 것이다
2025-01-16 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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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6 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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