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가 여름휴가를 보낸 우크라이나 카먄카에 있는 ‘푸시킨-차이콥스키 기념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유윤종 문화전문기자“나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헛되이 영혼의 평화를 찾아다녔지. 여기서 그 평화를 찾았어.”
러시아 음악문화의 상징인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여기’는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마을 카먄카에는 그의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남편 다비도프의 영지가 있었다. 한 살 아래로 오빠와 매우 친했던 알렉산드라는 “오빠, 여기를 별장이라고 생각하셔요”라고 말했다. 차이콥스키는 여름마다 이곳에 와서 영혼의 평화를 찾았다.
32세 때인 1872년 여름,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젊은 작곡가였던 차이콥스키는 두 번째 교향곡을 썼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초연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농담조로 “이 곡의 진짜 작곡가인 게라시모비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다. 게라시모비치는 여동생 집의 늙은 집사였다. 차이콥스키는 그가 부르는 우크라이나 민요 ‘학’을 듣고 4악장 주선율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이 곡을 ‘소(小)러시아’라고 불렀다. 소러시아(Малая Россия)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부르던 별명이었다.
우크라이나를 사랑했던 러시아인 차이콥스키를 오늘날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나라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스뱌토슬라우 리흐테르,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나탄 밀스테인 등 수많은 연주계 거장들을 낳았다. 위에 꼽은 네 사람 모두 모스크바에서 수학했으며 차이콥스키의 명곡들을 레퍼토리의 중심에 놓았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키이우에 있는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 학생들은 “학교 이름에서 차이콥스키를 빼야 한다”고 대학 당국에 요구했다. 이 학교의 학술위원회는 투표를 통해 학교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학교 당국은 차이콥스키의 증조부가 러시아의 집중 공습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크레멘추크에서 태어났다는 점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의 유명 지휘자인 옥사나 리니우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만약 키이우에 있는 ‘차이콥스키 길’ 이름을 바꾸자고 한다면 저는 반대할 겁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음악원 이름으로 ‘차이콥스키’는 적당하지 않죠. 우리 우크라이나도 불멸의 음악가를 여럿 갖고 있지 않나요?”
카먄카에서 작곡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2번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속내도 복잡하다. 늙은 집사가 불렀던 ‘학’ 외에도 1악장에 민요 ‘강둑 위에 저녁이 내린다’가 쓰이는 등 이 곡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랑하는 선율들이 들어있다. 소련 시대 키이우에서는 이 곡이 ‘우크라이나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애정을 보인 곡’으로 즐겨 연주됐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차이콥스키가 카먄카에서 행복을 느꼈던 사실을 알며 그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이 교향곡에 ‘소러시아’라는 제목은 쓰지 않는다. ‘소러시아’라는 말은 정교회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를 ‘대(大)러시아’로 부른 데 대비되는 교구(敎區)상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러시아인들은 이 용어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라는 뜻을 담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이 교향곡은 그냥 ‘교향곡 2번’ 또는 때로 ‘차이콥스키의 우크라이나 교향곡’으로 표기된다.
이 교향곡 4악장에 쓰인 민요 ‘학’은 춤곡풍의 유쾌한 선율이다. 하지만 이 민요의 제목은 우리에게 익숙한 러시아 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의 노래 ‘백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따금 나는/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쓰러진 그곳에 눕지 못하고/하얀 학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독일 병사들이 스러져간 우크라이나의 평원에서는 과거 독일에 함께 대항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병사들이 매일 목숨을 잃는다. 훈련을 가는 줄 알았던 먼 극동의 나라 북한의 병사들도 찬 평원에서 스러져 간다.
서울 예술의전당이 주최하는 2025년 교향악축제에 참여하는 강릉시립교향악단은 상임지휘자 정민 지휘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랑하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2번을 4월 5일 연주한다. 번호 외 교향곡의 별칭은 표기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협연하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도 이날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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