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一民) 金相万(김상만)선생께서 서거하신지 어언 3년. 이제 다시 저희는 선생의 높으신 덕과 경륜을 추모하며 간절한 그리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의 영전에서 가누기 어려운 슬픔으로 영결(永訣)의 말씀을 드리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에도 세월은 그침이 없어서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도 새로운 세기를 향한 성숙의 연륜들을 더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선생께서 이루신 업적은 더욱 빛나고 그 빈자리가 더욱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근면과 겸허를 생활신조로 삼아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온화하셨고 평소 과묵하면서도 사태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시대를 뛰어넘는 대의를 간직하셨습니다.
일민선생님.
선생께서는 우리 사회가 가장 심각한 긴장 속에 있던 시대에 민주언론의 대도(大道)를 지켜나아가는 데에 남다른 신념과 용기를 보여주신 거인이었습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동아일보에 휘몰아친 광고탄압과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선생은 자유언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가혹한 고초를 감내하셨습니다.
국제신문인협회(IPI)를 18년간 이끌어왔던 피터 갤러리는 1993년 베니스총회에서 일민선생을 「자유언론의 영웅」으로 찬양한 바 있습니다. 이 찬사는 일민 선생 한분의 영예가 아니라 민주언론의 본산인 동아일보와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해온 한국인 모두의 영예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민선생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발전과 한국학 진흥에도 각별한 애정을 기울이셨습니다. 고려대학교의 재단이사 및 이사장으로 1955년 이래 거의 40년에 달하는 기간중 일민선생이 대학에 쏟으신 정성은 고려대학교의 교육시설과 16만 교우들의 사회적 역량 속에 고귀한 힘의 원천으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영국의 대학에서 수학하여 서구적 학식을 갖춘 동시에 민족문화 연구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은 우리 문화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한 민족적 자아의 확립이 이 시대의 절실한 과제임을 선각하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크나큰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의 문화예술진흥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계승하고자 창립된 일민문화재단은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값진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일민선생님.
선생께서 차지하고 계시던 자리가 얼마나 컸던가를 이제와서 절실하게 깨닫고 보니 새삼스러운 안타까움과 간절한 추모의 정을 가눌길이 없습니다. 선생의 육신은 저희 곁을 떠나셨지만 민주언론과 민족문화 창달의 정신은 이 사회와 대학에 남아 영원히 그 빛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을 길이 추모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 간곡한 뜻을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길이 길이 평온 속에 명복을 누리십시오.
1997년1월25일
홍 일 식〈고려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