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총리 누구인가]장관직 3번거친 「행정의 달인」

  • 입력 1997년 3월 4일 19시 39분


[정연욱기자] 高建(고건)신임국무총리는 일반 공무원사회에서 「행정의 달인(達人)」으로 통한다.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로 이어진 학맥에다 행정고시(13기)합격, 37세에 최연소 도백(전남지사)으로 발탁, 교통부(80년) 농수산(82년) 내무(87년) 등 세차례에 걸친 장관기용 등 공직경력도 누구도 따르기 힘들만큼 화려하다. 「깔끔한」 일처리 솜씨도 남다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행정가로서의 기량은 88년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서울 정도(定都)6백년사업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2기 지하철공사착수 등 행정가로서 「도약서울」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들었다. 또 한보의 수서택지특혜분양 「외압(外壓)」을 끝내 거부한 소신도 공무원사회의 귀감으로 회자됐다. 수서특혜를 둘러싸고 盧泰愚(노태우)정부와 불화를 빚은 그는 시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시립대 총장후보에 올랐다가 임명절차만 남은 상태에서 돌연 후보직을 사퇴, 또다시 외압시비를 낳았다. 결국 수서사건 때 한보 때문에 서울시장직을 물러난 이후 6년만에 또 한보부도사태의 와중에서 총리로 발탁되는 「기연(奇緣)」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도 남못지 않게 쌓았다. 85년 2월 고향인 전북 옥구에서 당시 민정당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 지역은 고총리의 부친인 高亨坤(고형곤)전전북대총장이 6대 국회 때 야당인 민정당후보로 출마, 당선됐던 곳. 그러나 88년 총선에서는 「황색돌풍」에 밀려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金泳三(김영삼)대통령과의 인연도 각별한 편이다. 그의 부친인 고전총장은 김대통령의 대학(서울대 철학과)시절 은사. 또 고총리도 지난 92년 대선 때 직접 YS캠프와 인연을 맺었었다. 당시 YS의 외곽지원조직이었던 「동숭동팀」에 관료로서는 드물게 참가한 그는 YS의 집권후 개혁프로그램작성에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간사역을 맡았던 田炳旼(전병민)씨를 비롯, 50명여명의 관계 학계 등 전문가그룹이 참여한 동숭동팀은 정치 행정 경제 반부패 등 14개 분과로 나뉘어 2백여차례의 세미나를 열어 국정개혁프로그램을 작성했었다. 고총리는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94년 명지대총장을 맡기 전까지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 등 시민운동에 참여했으며 95년 서울시장선거 때는 야당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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