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신라인」 윤경렬옹에게 경주는 고향이 아니다.
「조선의 미(美)가 모여 금덩어리처럼 묻힌 곳」을 찾느라 통일신라의 수도에 정착했을 뿐.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 택한 「새로운 고향」이기에 그의 향토문화 사랑은 누구보다 각별하다.
어릴적부터 꿈꿔온 인형제작에 온전히 바친 전반(前半)의 삶, 우리 인형의 원형을 탐구해나가는 한편 54년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설립해 자라나는 세대에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심어온 일, 「경주 남산 고적순례」 등을 지은 향토사가로서의 활동…. 그가 80고개에서 되돌아본 평생이야기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학고재)을 내놓았다.
『고향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사람은 뿌리없는 나무처럼 불안하고 초조하죠. 자라나는 세대에 우리가 남길만한 고향과 조상의 문화얘기를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자라난 곳은 함북 주을. 책의 전반부는 넉넉지 않은 생활속에서도 정을 듬뿍 주고받았던 가족이야기와 우리 문화에 대해 박탈감을 지니고 살았던 식민지 치하의 교육이야기가 이어진다.
인형제작을 배우고자 일본에서 4년간 공부했던 그가 다음으로 선택했던 정착지는 고려왕조의 수도 개성. 이곳에서 그는 고미술학자 고유섭, 화가 오지호 등과의 만남을 통해 전통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다. 그러나 분단은 또 다른 선택을 그에게 요구한다.
『경주는 젊은 시절 언제나 한번은 가보자고 「비상금처럼」 남겨놓았던 곳이었죠. 계림으로, 첨성대로, 석굴암으로 헤매면서 밝고 힘찬 신라의 향기에 한없이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리 문화 사랑은 단지 향토에 대한 예찬에서 멈추지 않는다. 토우(土偶) 제작과 단청기법수련등을 통해길들인 손끝과 수많은 지적 탐구를 통해 다져진 그의 깊은 눈길은 책 곳곳에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진 숨결과 맥의 실체를 해부해낸다.
『통일신라의 문화의식은 고구려적인 강한 기상과 백제적인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가 경주라는 샘(泉)에서 길어올린 문화의 기호들은 이땅 방방곡곡과 이웃나라 너머를, 민족의 시원(始原)에서부터 다가오는 세대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유윤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