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는 1924년1월6일(음력 1923년12월1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씨와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씨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의도에서 서당을 다닌 김후보는 무척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다. 김후보의 어머니는 이런 김후보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보통학교에 다니던 김후보를 목포로 전학시켰고 여관을 경영하며 뒷바라지했다.
그 스스로가 말했듯 「정치」에 대한 집념은 어린 시절부터 싹텄다. 구장이었던 아버지에게 배달돼 오는 총독부관보인 「매일신보」를 매일 볼 수 있었는데 여덟살 무렵부터 정치면인 1면을 탐독했다는 것.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김후보는 사업에 투신, 20대 초반부터 10년 동안 흥국해운이라는 해운회사를 경영했고 3년간 목포일보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김후보는 마침내 54년 3대국회의원선거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시작한다. 김후보는 「6.25」때 위정자들의 실정으로 국민이 겪는 참상을 보고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 자신도 집안이 반동으로 몰리는 바람에 인민군에 붙잡혀 목포형무소에 수용됐으나 9.28수복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첫시도에서 고배를 든 김후보는 4대때인 59년6월 강원 인제로 본적까지 옮겨 민주당후보로 출마했으나 또 떨어졌고 60년7월 5대선거에서 세번째 낙선했다.
그러다 61년5월 인제보궐선거에서 「3전(顚)4기(起)」로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 사흘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국회의원선서도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6대때 목포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하면서부터. 6대국회에서 김후보는 본회의최다발언과 최장시간발언 등으로 「차세대주자」로 떠올랐다. 국회에서 「새파란」 김후보에게 망신을 당했던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대로, 7대총선에서 중진인 김병삼(金炳三)씨를 민주공화당후보로 공천하고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김후보 낙선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이같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당선한 김후보는 이 일로 오히려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고 70년 김영삼(金泳三) 이철승(李哲承)의원과 함께 이른바 「40대기수론」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김후보는 71년 신민당전당대회에서 막판뒤집기로 김영삼의원을 물리치고 대통령후보가 됐으나 박정희정권의 부정선거로 석패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듬해 「10월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는 5년반의 투옥, 6년반의 가택연금, 16년간의 정치규제, 3년여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72년 이후 주로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반정부투쟁을 벌이던 김후보는 73년8월 도쿄(東京)에서 중앙정보부요원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빠져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전두환(全斗煥)씨 등 신군부로부터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85년2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영구귀국한 그는 김영삼씨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반독재투쟁을 벌인 끝에 「6.10항쟁」과 「6.29선언」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어렵게 쟁취한 8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권분열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에게 패배했다. 92년12월 14대 대선에서도 「3당합당」을 성사시킨 「영원한 맞수」 민자당 김영삼후보에게 패배한 김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출국한다.
그러나 95년 「6.27」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자 김영삼정권의 실정(失政)을 명분으로 정계은퇴를 번복했고 이기택(李基澤)총재가 이끌던 민주당과도 결별, 국민회의를 창당한다.
지난해 「4.11」총선에서 국민회의가 제1야당으로 부상하자 대권재도전을 선언한 김후보는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와의 「DJP연대」를 기반으로 「대선4수(修)」의 길을 걷고 있다.
〈최영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