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7월 평양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품은 그에게 6·25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평양교회 장로였던 부친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의 철수가 결정되자 결코 떠나보내고 싶지않았던 쉰둥이 막내의 등을 떼밀었다.
“전황이 좋아져 국군이 다시 평양을 수복하면 그때 내려가마.” 그러나 부친의 한마디는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강인덕(康仁德)신임통일부장관은 역대 이북출신 각료중 6·25이후 월남한 유일한 인물. 그런 만큼 그가 북한과 통일을 보는 시각도 남다르다.
71년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남북간의 막후 접촉 산파역을 맡았다. 72년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조절위원회 때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
그는 또한 북한의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아 70년대 초 해방이후 최초로 북한 경제 실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해 한국경제와 비교분석한 ‘남북한 경제력 비교’를 내놓기도 했다. 북한의 합영법 연구로 경희대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 초부터 KBS사회교육방송에서 매일 새벽 방송되는 ‘노동당 간부들에게’의 진행을 맡고 있다. 직접 원고를 작성해 북한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국 통일정책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그의 강의는 논리정연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김세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