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올초 데뷔작 참패, 유학파 영화감독 2인의 각오

  • 입력 1998년 3월 5일 08시 46분


《“그렇다. 참패했다. 그러나 흥행을 두고 말할 때만이다. 끝난 것은 없다. 이제서야 미래가 시작되었을 뿐….” 올초 잇따라 데뷔작을 선보인 유학파 감독 문승욱(32) 이서군(23).

단편영화제에서 쟁쟁한 창작기량을 인정받았던 두 사람의 처녀장편 ‘이방인’(문승욱)과 ‘러브 러브(Rub Love)’(이서군)는 수억원의 제작비를 유료입장권 1만여장과 바꾸는, 쓰디쓴 잔을 마셔야 했다. 그동안 제작과정과 의지를 들어본다.》〈편집자〉

▼ 「이방인」문승욱감독 ▼

문승욱의 ‘이방인’은 폴란드 유학파감독이 해외에서 제작비 절반과 배급망을 끌어와 합작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언론은 의식적으로 그의 영화를 조명했다. 유랑하는 태권도사범 김, 그의 곁을 스쳐가는 경쾌한 폴란드 카페여급 욜라, 치기어린 태권도수련생 미하우를 통해 부초 같은 삶의 단면을 청명한 화면 속에 그리려 했다.

그러나 절제된 영상미가 영화의 서술을 질식사시켰다. 세 사람은 ‘평균인’이며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갈데까지 가버린 소외의 신음은 들을 수 없다. 독신으로 만난 김과 욜라의 사이에는 태권시범만 있으며 감정은 전혀 깊어지지 않는다.

“왜 육체적 접근이 없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통속적으로 만들기 싫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낯선 장소, 낯선 남녀의 급작스러운 교합을 통해 소외의 극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문감독은 애초의 시나리오는 달랐다고 말했다. “아비 모를 아기를 밴 욜라는 병에 시달리고, ‘북한망명객’은 항상 가난과 두려움에 쫓깁니다. 김은 이들을 위해 밤무대에서 태권도쇼를 연기하지요. 박치기 격파로 정신마저 이상해져 있는데 욜라는 출산한 아기를 그에게 떠맡기고 달아나버립니다….”

그는 서울단편영화제 대상수상작가. 심사를 맡았던 안성기는 이 시나리오에 반해 주연에 응했지만 어느 순간 줄거리가 바뀌어버렸다. 제작비를 대겠다고 접근한 프랑스 ‘카냘 플리스’측이 현재와 비슷한 스토리를 제시한 것이다.

“더욱 치열한 작가정신, 수련이 필요하다”고 되뇌던 그는 폴란드로 올봄 다시 떠난다. 거름이 되었던 데뷔작. 다음 작품으로 지펴내는 불꽃에는 그 거름이 기름이 되리라는 다짐을 하며.

▼ 「러브러브」이서군 감독

이서군감독의 ‘러브 러브’는 제작 전부터 화제였다. 어린 나이에 뉴욕대 영화과 진학, 금관단편영화제 대상 수상, 21세에 박철수감독의 컬트영화 ‘301·302’ 각본집필, ‘열음사’대표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어머니 김수경씨 등 화려한 수식어가 이감독 뒤에서 빛났다. 그는 또 이번 작품으로 ‘약관(弱冠)입봉’의 최야성씨 뒤를 잇는 ‘차연소(次年少)’데뷔를 기록했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되자 언론은 외면했다. 관념적 실험속에 구체적 현실이 ‘암매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렬했던 일들은 시간에 마모되면서 기억 속에 흐릿해져 간다. 존재의 취약성에 대해 담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요염한 킬러’ 나나(이지은)와 만화가 한(안재욱)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관객이 줄거리를 짚어내기도 쉽지않을 만큼 ‘난해’하다. 시간배경은 2028년으로 설정됐으나 다이얼전화와 구식선풍기가 돌아가고, 인적 없는 거리와 썰렁한 여관에는 현실감이 없다. 킬러에겐 단호함 대신 애교가 엿보이고, 그에게 살해당하기를 자청한 ‘고객’은 연신 웃음을 자아낸다. 진지성과 해학 사이의 경중(輕重)조절이 없다.

그러나 이감독은 “킬러도 킬러 답지 않고, 사랑도 사랑 같지 않은 낯선 설정, 낯선 공간을 통해 확실한 것이라곤 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작위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전무후무한 실험을 감행했다. 이제는 그것이 재산이 된 셈이다.

비평가 강한섭씨는 “아쉽다. 그 과감한 용기와 실험성은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컴퓨터통신망에선 찬사가 이어졌다. 그는 다시 뉴욕의 외로운 자취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자신만만하다. “젊다는 것이 저를 격려합니다. 실험요? 앞으로 더해나갈 겁니다.”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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