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상금 2천만엔(한화 약 2억원)의 임자를 가리기 위한 후지쓰(富士通)배 세계바둑대회 8강전이 열리던 6월초. 조훈현 유창혁 마샤오춘 위빈 창하오 히코사카 왕리청 등 강호(江湖)의 기사(棋士)들이 속속 호텔에 도착했다.
“아무리 큰 대회라도 그렇지.”
기사들은 짐을 풀자마자 야자수 늘어진 정원을 거닐며 절경을 즐긴다.
같은 시각 한국기원 관계자들의 숙소는 준비로 바쁘다. 그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창호9단의 ‘매니저’격인 친동생 영호(英鎬·23·인하대전자계산학과 4년)씨다. 바둑판을 방으로 보내 달란다.
“역시 이창호야. 아무도 못말린다니까.”
제주행 비행기 안, 공항에 도착해 한라산을 넘어오는 동안 줄창 잠만 청하던 이9단이다.
바둑판이 방안으로 들어간 뒤, 저녁 참이 되어도 이창호 형제는 방 밖에 나서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11시경 택시로 10여분 거리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호텔로 돌아와 두문불출. 저녁식사는 룸서비스.
대국일 아침. 대국시작 시간인 오전10시가 다가오자 유창혁을 선두로 기사들이 나타났다. 이창호도 카메라 앞에 머쓱한 표정으로 선다. TV중계를 위해 바둑판 위에 쏟아내는 강렬한 라이트에 눈이 부신 이창호는 연신 물수건으로 얼굴을 훔친다. 대국 시작후 5분, 취재진은 철수했다.
이창호는 낮12시반 호텔 지하1층 일식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는 곧바로 방으로 사라졌다. 유창혁과 조훈현9단이 호텔 앞 정원 산책을 하는 모습과 판이하다. 저녁6시,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중국기사 위빈은 마침내 돌을 던졌고 이창호는 준결승에 진출했다.
남은 것은 대회 주최측인 일본기원과 후지쓰사가 마련한 합동만찬. 승패를 털어버린 기사들이 호텔로비에 모였다. 팬들이 이창호9단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악수를 하는 표정은 익숙하지 못하고 자세는 안절부절, 보는 이조차 불안하게 만든다.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는데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그의 바둑은 9단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이창호의 ‘사회생활’ 급수는 9급이나 되는 것일까.
이창호9단을 이해하는데는 그와 가장 친한 한살 밑 친동생 영호씨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영호야,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책은 첨 봤다. 인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 같아.”
이창호는 서귀포에 도착하던 날 한시간 쯤 바둑판에 돌을 늘어 놓아 보더니 그만두고 2시간 가량 책을 읽었다. 바둑책? 아니다. ‘이야기 중국사’다. 달포 전 그는 ‘이야기 한국사’를 끼고 다녔었다. 중고시절 공부에 파고들었을 리 없는 이9단에게 바둑책 말고 다른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무료해진 형을 달래려 동생은 항간의 우스갯 소리를 몇가지 해주었다.형은 깔깔거린다. 그러더니 일변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야, 너도 원래 나처럼 내성적이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어졌냐. 네가 부럽다. 난 노력해도 잘 안되던데….”
바둑천재인 그도 안되는 게 있는 모양이다.
대국전야 방안에 줄곧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바둑공부나 전투를 위한 휴식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게 편해서다. 어울리기 힘겨워하는 이9단. 대화가 없다보니 오해를 사기도 한다.
“워낙 착하다보니 그렇지요.”
유창혁9단의 단짝 김영환(金榮桓)프로4단의 말이다. 이창호는 10대에 세계 정상에 올라 공식석상에 등장해야 했다. 넥타이도 매야 했다.넥타이가 조금만 비뚤어져도 선배기사이자 어른들은 ‘잔소리’를 한다. “넥타이 하나 못매다니….”
인터뷰 요청은 쏟아졌고 할 말은 없고, 말주변은 없어 더 답답하고. 그럴 수록 ‘닫힌 사회’속으로 파고 들었을 것이다.
“내성적인데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예요. 아무리 조심해도 주위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듣게 되지요.”
세계아마대회 우승자 김찬우(金燦佑)아마7단도 그를 감싼다. 아는 이들은 이처럼 이창호9단을 ‘내성적’이라고 잘라 말하지 않고 여운을 남긴다.
조훈현9단은 간접화법으로 충고한다.
“저도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군입대 문제로 일본에서 귀국했을 땐데 한국말도 못하지요, 친구도 돈도 없지요. 도무지 웃을 일이 없었어요. 그 뒤로 타이틀을 따게 되고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많이 노력했지요.”
눈물과 노력으로 ‘천하 바둑’이 된 이국수. 그러나 어찌보면 바둑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바둑판 밖 ‘사회’를 익힐 기회가 없었던 탓이리라. 그러나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팬들의 훈수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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