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대부」故 이경재신부 육필수기 공개…내달말 출간

  • 입력 1998년 6월 27일 07시 20분


“나도 다미안신부처럼 되고 싶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그들과 함께 죽어가고 싶습니다.”

지난달 11일 선종(善終)한 ‘나환자들의 대부(代父)’ 천주교 성나자로마을의 이경재(李庚宰)신부. 그가 숨지기 전 병상에서 사제서품 후 46년6개월간의 삶을 깨알같이 메모한 육필 수기 ‘새 삶을 바라보면서―일하던 사제가 기도하는 사제로’가 26일 공개됐다.

“내 생전에 처음 나환자를 본 것이다. 무서움은 하나도 없었다. 20평 정도의 텐트 성당에서 나환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올렸다. 일주일 후 그들은 다시 찾아와 성나자로 마을로 아주 들어와 달라는 제의를 했다. 너무 뜻밖의 제의였다. 그 후 그 말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1951년 12월24일. 경기 수원의 몰압산 근처 성나자로마을의 나환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신부의 구라(救癩)사업은 결국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생전의 그는 특유의 온화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웃이 됐다.

성악가 조수미(曺秀美)씨. 91년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조수미씨가 모차르트 2백주기 기념음악회에 출연했다. 조씨의 황홀한 목소리에 감동받은 이신부는 공연이 끝난 후 조씨를 찾았고 그녀는 “공연전 길거리 성당에서 한시간 동안 기도를 해서 노래를 잘 부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후 조씨에게 영세를 준 이신부는 조씨가 외롭고 힘든 시절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정신적 기둥이었다.

북한을 탈출한 후 미국에서 연방수사국(FBI)의 보호를 받고 있던 최은희(崔恩姬) 신상옥(申相玉)부부도 이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70년대초 안양예술학교 교장시절 학생들과 함께 성나자로마을을 방문해 위로공연을 해준 최은희씨를 위해 이신부는 미국까지 달려가 워싱턴의 바티칸성당에서 이들 부부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외에도 중국여행 도중 백두산 천지에서 영세를 준 작가 한수산(韓水山)씨, 사연이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영세를 받으러 온 가수 심수봉(沈守峰)씨, 딸이 사랑의 선교회 수녀원에 있는 운보 김기창(金基昶)화백과의 일화 등도 소개됐다.

이신부가 깨알같이 적은 메모를 작가 곽인행씨가 재구성, 7월말경 ‘이경재 신부님’이란 책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이 책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김수환(金壽煥)추기경 조수미씨 봉두완(奉斗玩)나자로돕기회장 등 이신부와 가깝게 지냈던 10명의 회고담도 수록된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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