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말 일본에서는 무인들을 중심으로 다도(茶道)가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황폐화된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 즉 찻잔이 필요했다.
이무렵 일본인들은 조선으로부터 막사발을 들여갔고 이것이 찻잔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막사발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의 그릇을 한개라도 갖는 것은 대단한 자랑이었다. 당시 일본의 차마시기 열풍은 찻잔구하기 열풍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그릇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니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이순신장군에게 쫓기면서도 끝까지 도공을 잡아간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일본에 붙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먼저 한 일은 찻잔만들기였다. 사쓰마지역의 심수관 일가도 마찬가지였다. 16세기말 17세기초에는 원통형 찻잔을 주로 만들었고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장식용 자기 등으로 다양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일본 자기는 부쩍 발전했고 하나둘씩 서양에 소개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가던 사쓰마의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의 새로운 조류에 부닥치면서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전통을 어찌 할 것인가.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18세기에는 일본 취향의 금빛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쓰마 도자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단순하고 담백했다. 상아빛 자기는 사쓰마뿐이었다. 즉 조선의 전통을 바탕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말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 도자기는 영국 중국 도자기 등을 접하며 세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하는 부분 이외는 칼로 파내는, 화려하고 정교한 투각(透刻)기법이 대표적 예다. 12대 심수관도 이러한 기법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일본의 대표적 도공으로 자리잡았다.
4백년 동안 한국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대를 이어 도자기에 전념해온 심수관 일가의 정신이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 일본적 미감이 드리우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 단순하고 청아한 조선 도자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정리〓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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