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함께 세상에 태어나 조국의 영광과 좌절, 시련을 함께 겪으며 일어서는 나라에 힘을 보태온 이들이 15일 건국 50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태어나자마자 6·25전쟁을 맞아 부모의 등에 업혀 피란살이를 하고 청장년시절 4·19와 5·16, 유신, 10·26 등 격동의 현대사를 지켜보고 몸으로 부닥치며 헤쳐온 사람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못먹고 헐벗으며 피와 땀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이제 그 열매를 즐겨야 할 나이 50세. 그러나 평생소원이던 ‘쌀밥에 고기반찬’을 노래할 만하자 난데없이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겪게된다. 산업역군으로 젊음을 바쳤던 직장에서 이제 퇴출대상으로 몰리게 된 그들의 지나간 반세기 개인사는 곧 한국현대사 그 자체다.
김주화(金周和)대림산업 토목사업본부 이사. 50세. 1948년 8월15일생.
독립기념관 옆동네인 충남 천안시 성남면 용원리에서 태어났다. 이땅의 동갑내기가 다들 그러하듯 유소년시절 기억이라고는 먹을 것이 없어 늘 배를 움켜쥐고 다니던 생각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봄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서울에 ‘난리’가 났다며 4·19혁명에 대해 얘기해 줬지요.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머릿속에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나봐요.”
그 해 가을 12세의 소년은 혈혈단신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조상 대대로 땅을 일구며 살아온 고향을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용산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도로마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늘어선 모습은 시골소년에게 너무나 신기하고 낯설었다. 서울은 무섭고 외로운 곳이었다.
“계엄령으로 열흘간 휴교한 뒤 등교했더니 이전의 학교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어요. 분위기도 딱딱했고 조회때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혁명공약을 낭독했지요.”
고향에서 아버지와 두 형이 농사를 지으며 뒷바라지했지만 그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동고 1학년때부터 부잣집에 입주 가정교사를 했다. 교복을 입은 채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거리를 누볐고 대학생이 돼서는 삼선개헌 반대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맞부닥쳤다.
제대와 함께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했다. 우리 경제가 날개를 달기 시작하던 73년, 첫 월급이 3만8천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늘 고도성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의 청년기는 건설의 시대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 영동 호남고속도로 소양강댐 등이 모두 이때 건설됐다.
79년 10·26사태로 유신은 종말을 고했지만 계엄통치는 변하지 않았다.
민간회사로 옮긴 80년 ‘서울의 봄’. 그는 서울역 근처 회사 옥상에 올라가 끝이 보이지 않는 데모행렬과 상공을 선회하는 헬기를 번갈아 보며 땀흘려 건설한 경제가 주저앉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곧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다. 시위, 특공대진압, 총격전…. 무거운 가슴을 안고 그 해 6월 필리핀 건설현장에 투입됐다. 교민사회도 흉흉했고 외신은 온통 조국 광주의 비극에 집중돼 있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직장을 대림산업으로 옮겼다. 외국에서 번 돈으로 마련한 아파트에서의 첫 밤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감격이었다.
84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갔다. 3년동안 열사(熱沙)의 나라에서 담암비행장 건설에 참여했다. 젊은 부하직원들은 ‘넥타이부대’가 되어 싸웠다.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부동산 폭등으로 땅값이 유사이래 최고로 뛰면서 건설업은 짭짤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거품이 거품을 낳는 사이 결국 IMF비극이 잉태되고 끝내 지난해 외환대란 충격은 건설업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거나 부도를 내고 숨어지내는 현실 앞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평생 한눈 팔지 않고 앞만 보며 달린 결과가 실직이라니….”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피땀으로 일군 ‘성장신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렇게 단시일에 우리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한 나라는 세계에 없습니다. 비록 IMF로 주춤하고 있지만 맨손으로 중동에 빌딩을 세우던 의지와 정신력을 되찾는다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윤종구기자〉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