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 내
최종현(崔鍾賢)SK회장의 별세는 오너경영인들의 부침사(浮沈史)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재벌 수난의 시대,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10여년 전부터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과시해왔던 그였지만 지난해 봄 뜻밖에 폐암선고를 받고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최태섭(崔泰涉)한글라스명예회장의 타계도 재계의 큰 손실이었다. 그는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평생 유리 하나에만 매달린 재계의 사표(師表)였다. 양복 한벌을 10년 이상 입었다는 그는 “총수는 기업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청지기’로 일관된 삶을 마쳤다.
여성계는 ‘어머니’를 잃었다. 국내 첫 여성변호사로서 여권신장에 평생을 바친 이태영(李兌榮)여사가 “통일이 되면 판문점에 이산가족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겠다”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개설했고 76년 한국여성운동의 산실인 여성백인회관 건립을 주도하는 등 여성권익 향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문학계는 마지막 ‘청록파’시인 박두진(朴斗鎭)과 ‘혼불’의 작가 최명희(崔明姬)를 잃었다. 세상의 온갖 부름에도 초연히 ‘지조’를 지켜온 박두진은 조지훈(趙芝薰)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한국 시단을 지켜온 문단의 산 증인이었다.
최명희는 2백자 원고지 1만2천장 분량의 ‘혼불’ 10권을 남겨놓고 홀연히 혼불처럼 사라져갔다. ‘혼불’은 최씨가 17년간의 대장정 끝에 이룬 90년대 한국문학의 최고성과로 평가받는다.
올해에는 유독 많은 대중문화의 스타들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눈물젖은 두만강’의 국민가수 김정구(金貞九)씨가 미국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60여년간 시대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서민들의 심금을 울린 가요계의 큰별. 80년 가요인으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함남 원산 출신인 그는 입버릇처럼 “통일이 되면 죽어서라도 고향땅을 밟겠다”고 말해왔다.
불의의 화재로 숨진 김기영(金綺泳)감독은 우리 영화의 새 지평으로 끊임없이 달려간 만년 영화인. 그는 자택에 걸려있던 ‘유성영화사’란 간판과 수많은 영화소품들과 함께 산화했다.
만년연기인 김진규(金振奎)씨와 이낙훈(李樂薰)씨도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통해 사랑받던 스타들. 김씨는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멜로 주인공이나 방황하는 중년 등 시대의 인간군상을 빚어냈다. 11세때 아역성우로 데뷔한 이씨는 연극배우와 탤런트로 중후한 연기를 선보였다.
시사만화의 개척자인 ‘코주부’ 김용환(金龍煥)씨도 말년을 보낸 미국에서 숨졌다.
이밖에 71년 경찰의 학생시위 과잉진압에 대해 “백주에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횡행하고 있다”는 발언을 비롯해 수많은 일화를 남긴 유기천(劉基天)전서울대총장, 올곧은 언론인의 표상이었던 홍종인(洪鍾仁)선생, 변절을 싫어하며 야당 외길을 걸어온 고흥문(高興門)전국회부의장 등도 우리 곁을 떠났다.
또 종교계에서는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를 33년간 지낸 대산 김대거(大山 金大擧)상사가 열반했고 태고종 원로인 충담(沖湛)스님은 자기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으로 입적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 국 제
지난해 현대 중국건설의 아버지인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과 빈자(貧者)의 어머니인 테레사 수녀, 세기의 연인 다이애나 전 영국왕세자비 등 찬란한 별들이 사라진 것과는 달리 올해는 그같은 비중의 ‘특 일등급 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인들의 영혼과 가슴을 사로잡았던 문화 예술계의 별들이 그 찬란한 빛을 거둬들였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으로 ‘마이 웨이(My Way)’ 등 사랑과 인생을 다룬 2백여 불멸의 히트곡을 남긴 미국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 5월 그의 장례식에는 40, 50년대 ‘오빠부대’였던 수많은 할머니에서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손수건을 쥔 추도객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60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던 그는 미국의 국민가수이자 대중문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했다.
세계 영화계는 큰 스승을 잃었다. 일본 영상미학의 아버지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 그는 생시에 “일본에는 천황이 둘이 있다. 하나는 황궁에, 또하나는 영화에…”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오늘날의 대거장들은 8㎜카메라 습작시절부터 그의 작품을 교과서처럼 보고 또 봤다. 일본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호외와 1면 톱기사로 보도해 거장에게 경의를 표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을 파헤친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74년)과 ‘펠리컨 브리프’(93년) 등을 감독한 미국의 앨런 파쿨라도 11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밖에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소설로 러시아 반체제문학을 주도해 온 블라디미르 두딘체프, 30년대 세계 무대를 휩쓴 러시아의 전설적 발레리나 갈리나 울라노바도 세상을 떠났다.
88년 서울올림픽 여자육상 3관왕의 주인공 그리피스 조이너도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전세계 스포츠 팬들을 놀라게 했다. 긴머리에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육상복, 긴손톱 등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조이너는 은퇴 후 불우 어린이돕기 자선활동을 벌였으나 그녀의 인생은 선수시절의 주종목 처럼 ‘단거리’로 끝났다.
70년대 중반 2백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 포트도 캄보디아 정글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인간 백정’이라는 비난 속에 처참한 말년을 보내던 그는 끝내 자신의 원죄(原罪)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속죄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정치지도자로는 중국 건국의 ‘8대원로’중 한명으로 국가주석을 지낸 중국의 양상쿤(楊尙昆), 89년 ‘69일 총리’를 지낸 일본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미래의 생활양식에 혁명을 불러올 ‘정보의 바다’를 창조해낸 인터넷의 초기개발자인 존 포스텔도 사이버공간 뒤로 사라졌다.‘www.donga.com’과 같은 도메인 이름 짓는 법, 파일전송 등 인터넷 통신규약 등이 모두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올 2월 전해진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일본 중의원의 자살소식은 한국인들에게 특히 충격을 주었다. 민족차별에 맞서 당당히 한국계임을 밝혀온 그는 불법 정치자금거래 혐의로 검찰이 수사망을 좁혀오자 도쿄(東京)시내 한 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