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인가, 민족반역자인가.’
3·1운동 당시 서울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던 한국인 형사 신철. 그는 10년 경력의 형사답게 사냥개 같은 ‘예민한 후각’으로 3·1운동을 사전에 감지했으나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인물이다.
3·1운동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 2월 27일 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에 갑자기 신철이 나타났다. 그는 인쇄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곤 말없이 사라졌다.그가 입을 열거나 조치를 취할 경우 독립운동은 싹도 틔우기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 위기였다.
당황한 천도교 중진 최린(崔麟)이 몰래 사람을 보내 그를 만났다.
“만약 입을 다물어 준다면 역사는 신철이라는 사람을 기억할 것이오.”
최린은 당시 거금인 5천원을 내놓으며 비밀유지를 당부했다.신철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 돈을 거절하곤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그는 그 길로 종로서에 ‘만주로부터 신의주에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한 뒤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버렸다.
당시 경무총감부에는 서울과 지방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3·1운동이 터진 뒤에야 신철의 ‘배신’을 눈치 챈 일본경찰은 용산헌병대에 연락해 그를 체포하도록 했다.그는 결국 체포됐지만 미리 이같은 날이 올줄 알았던지 품안에 준비하고 있던 청산가리를 마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당시 냉혹한 일본형사로 민족반역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였지만 그의 침묵으로 3·1운동의 발화가 가능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진녕기자〉jinnyong@donga.com
★해주기생 문향희★
3·1운동에 얽힌 숨은 인물중 황해도 해주의 기생 문향희(文香姬)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본명이 문재민(文載敏)인 그는 뒤늦게 공적이 평가돼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애국지사의 반열에 올랐다.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번지던 1919년 4월 1일. 문향희는 동료 기생들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려 들고 해주읍 중심가로 나섰다.
일본경찰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어리둥절했다. 이 때문에 이날 해주읍의 시위인파는 삽시간에 3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일본 경찰과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이 뒤따랐고 결국 기생들도 붙잡혀 문향희 등 8명이 구속됐다. 그 때 문향희의 나이는 16세.
14세때 부친이 생활에 쪼들린 나머지 당시 집 한 채 값인 2백원을 받고 기방에 파는 바람에 기생이 됐지만 미모에다 총명해 명성이 높았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지방유지들이 뜻을 모아 그를 기적(妓籍)에서 빼주고 공부를 시켰다. 이 덕에 그는 이듬해 개성 호수돈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이어 경성 이화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다 그만 폐병에 걸려 만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진녕기자〉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