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남편을 여의고 갖은 풍상속에 독립운동가 외아들을 뒷바라지한 곽여사는 거목 백범을 지탱해준 든든한 뿌리였다. 백범의 저서 ‘백범일지’에는 어머니와 관련한 감동적인 얘기들이 여럿 담겨 있다.
백범이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곽여사는 아들을 면회해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태연히 말했다. 1915년 4년만에 출옥한 백범을 위해 친구들이 위로연을 열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키자 곽여사는 대로해 “내가 여러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고 백범을 꾸짖었다.
1934년 중국 쟈싱(嘉興)에서 9년만에 백범을 만난 곽여사의 첫 마디는 “나는 이제라도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체면을 보아주는 것일세”였다.
백범이 난징(南京)에 있을 때 동지들이 돈을 모아 곽여사의 생신상을 차리려 하자 곽여사는 한사코 돈으로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단총(短銃·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놓았다.
〈문 철기자〉full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