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주년 특별기획]진보주의자 조봉암 사상 재조명

  • 입력 1999년 3월 18일 19시 02분


『나는 비록 법에 의해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과히 상심하지 마세요.』

59년 7월30일 서울구치소.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직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은 가족들과 진보당 관계자들과의 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다음날 사형집행됐다.

올해는 죽산 조봉암의 탄생 1백주년이자 간첩혐의로 사형 당한 지 40주년되는 해.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은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중도파 진보주의의 싹이 잘려나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특히 대통령선거에 두 차례나 출마했던 현역 야당 대통령후보가 재심청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점에서 재판과정의 공정성이 의심받기도 했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의 언론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사법살인(司法殺人)’ 또는 암살과 반대되는 의미의 ‘명살(明殺)’이라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진보당의 정강정책‘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한다.’(진보당 강령 중)

일제 때 조선공산당의 창당멤버였던 조봉암은 해방 후 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보내는 서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통해 공산당과 정식으로 선을 긋는다. 이후 이승만정권의 단정에 참여, 의회민주주의자로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반자본 반공산’의 중도파 노선의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죽산은 ‘우리의 당면과업’이란 청사진을 통해 민족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과 소련, 유엔 등과 균형감각있는 외교를 통한 ‘평화통일론’을 내걸었다. 또 극좌 극우를 배제한 민주대연합의 정계개편을 주창하며 ‘대중의 수탈이 없는 경제개혁과 민생개혁’ 등 혁신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당의 개혁론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대통령과 보수세력의 반발로 좌절됐다.

“비록 죽음으로 막을 내렸지만 죽산의 민주통합론과 개혁론은 한국정치사의 밑거름이 됐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평화통일론’은 이후 7·4공동성명 남북합의서 등을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조영건·曺永建 경남대 교수)■한국의 진보주의 정당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은 8개월 뒤 4월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는 이승만정부의 정권연장을 위한 단발마적인 행위였다.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궤멸을 계기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됐고 혁신정당의 전통은 싹부터 잘리게 됐다.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은 한국 정치사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중도파’의 비극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해방공간에서 건준(建準) 근로인민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북협상파 사회대중당 등 진보정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모두 제도화되지 못하고 소멸해갔다.

이와 같은 상황은 80년대 말에 생겨난 민중당도 마찬가지였다.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한국의 정치체제를 서구 유럽형 보혁양당제(保革兩黨制)가 아닌 미국형 보수양당제(保守兩黨制)로 정착시키려는 미국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鄭太榮)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20세기 초 일제의 지배를 받느라 민주주의에 대한 기회를 갖지 못한 한국은 해방 후 미소간 냉전이 열전으로 불붙은 상황에서 좌우 어느 한쪽만의 선택을 강요당했다”며 “조봉암의 죽음은 한국의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이분법적 흑백논리’만이 지배한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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