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남대문·동대문시장에 미래있다』

  • 입력 1999년 4월 15일 19시 46분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白南準·67)선생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시리즈‘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이 매주 1회 독자여러분을 찾는다.

백선생은 비디오예술의 창시자, 멀티미디어아트의 선구자, 행위예술가, 작곡가로서 20세기 문화예술의 지평을 한단계 높인 인물로 국제사회에서 평가받는 인물.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첫 전시회로 2000년 1월부터 석달에 걸쳐 ‘포스트 비디오―백남준회고전’을 마련, 21세기 예술의 나아갈 바를 모색할 예정이다.

96년 4월 그는 뇌졸증으로 쓰러져 부자유스러운 몸이 되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창작정신으로 후학들에게 불꽃같은 예술가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첫회로 백선생이 보낸 친필 서언(序言)과 그의 근황을 싣는다. 이어지는 시리즈는 미술평론가이자 백남준예술의 전문가인 이용우(李龍雨)씨가 집필한다.》

▼美서 보내온 백남준씨 친필 序言 ▼

유서깊은 동아일보에서 나의 왜소한 예술인생을 연재한다 하니 한편으로는 영광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벌써부터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흐른 모양이다. 다행히 내 예술과 인생을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니 여간 안심되지 않는다. 글을 쓰게 된 비평가 이용우씨는 나와 오랜동안 사는 이야기, 예술이야기를 나누어온 지기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하듯이 그도 나의 인생과 작업의 일부분을 이해하고 기술할 것이다.

한국의 어느 일간신문에 쓴 글에서 나는 과욕으로 인하여 하늘의 벌을 받고 병을 얻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누구나 인생을 빠르게 가려다 보면 과욕을 하게 되는데 나는 예술과욕에 빠져 있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서도 또 다른 욕망의 하나로 2000년에 열릴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을 구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미래도 종종 생각하면서.

96년 4월, 내가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한방의가 내게 준 약의 대부분은 북방동물의 내장이었다. 첫째가 웅담이요, 둘째는 신비하다는 사슴 노루의 냄새나는 배꼽인 사향이었고, 심지어는 해구라는 남극동물의 물건까지 있었으니 나는 온갖 것을 베어먹은 셈이다.

눈 속에서 자생한 동물은 강한 모양이다. 양주동에 의하면 여진(女眞)과 조선(朝鮮)은 북방어로 같은 발음의 조선이라 한다. 한국인이 강하고 질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영하40도의 만몽지방에 살고 있었고 그 중의 리더가 남으로 가자고, 이스라엘의 모세처럼 민중의 대탈출을 기도하였다. 쫓아오는 대평원의 늑대를 맨손과 석기로 때려죽이면서 대동강까지 도달하는데는 수천년이 걸렸다. 그래서 단군전설이 생겼다.

그러면 왜 우리 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와 같은 세계적 거물이 못되었느냐?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대한민국은 이스라엘처럼 민족의 유리표방을 거치지 않고 그래도 안정된 중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볼때, 우리 한인은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하였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이미 근대사에서 우리는 서양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번의 문화적 르네상스를 가진 바 있다. 일제치하의 그 아름다운 민족시와 1945년 김순남과 이건우의 음악이 있었다. 당시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세계적인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1백년 전에 이미 해결하여 놓았던 것이다. 일제하에서도, 6·25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재벌독점, 환경오염에서도 이 두 시장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우리는 목탄차와 오징어 수출로 8·15와 6·25를 이겼다. 그 이유는 진보된 자유시장에 있다.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아랍권 시장기능의 원형인 바자(Bazaar)의 변형이다. 바자는 페르시아와 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에서 시작되어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신짱, 위구르, 그리고 한국의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거쳐 다시 중국대륙의 시장으로 연결된다.

까마득한 세계경제의 동맥을, 독재도 못 건드리고 독점기업도 건드리지 못하는 양대 시장의 기능을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란의 샤 왕조도 결국 바자의 상인에 진 것이다. 왕조는 갔어도 페르시아의 바자는 생생하다. 자본도 변변치 않은, 노력투성이의 경제라 시장상인은 아무도 무섭지 않고 특혜융자도 필요없다. 양대 시장이 거대부패와 특혜융자에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왜정시대 토굴과 지게꾼, 박물장수와 상인들의 요란한 외침과 소음, 연탄중독과 연탄난로, 지긋지긋한 화재, 후보 운동선수처럼 불만 났다 하면 제일 먼저 터지고 타는 남대문 동대문 시장, 불타 폭삭 주저앉았나 싶더니 다음 날 여지없이 제일 먼저 문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달라졌다고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이런 자유경제가 자본주의의 능률을 최상으로 올리고 한국을 지켜온 것이다.

북방동물은 강(强)과 더불어 꾀가 있어야 산다. 강한 개인 개인이 독립, 자주하여 경쟁하는 21세기에 우리 한인들의 활약과 활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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