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예술은 사기다』폭탄선언

  • 입력 1999년 4월 22일 19시 39분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은 지관을 데리고, 이상적인 묘 자리를 찾아다닐 그럴 나이가 됐으나, 나는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그런 국토낭비계획은 없애고 대신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 내 인생의 행운의 하나는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조셉 보이즈가 거의 무명 때에 만나 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거장인 두 연장자와 역경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하게 교우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이 55세가 되던 1987년, 그는 절친했던 친구이며 독일예술계의 거장인 조셉 보이즈를 위한 추모집 ‘보이즈 복스’(Beuys Vox)의 첫머리에다 위와 같은 미묘한 넉두리를 늘어놓았다. 나이와 죽는 이야기로 시작한 이 글은 바로 한 해 전에 타계한 보이즈의 죽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감정적 여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글은 죽음이라는 감상적 주제를 백남준 특유의 필치로 절묘하게 유입시킨, 그의 다채롭고 격정적인 삶과 예술이 포괄적으로 담겨진 수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가령 백남준이 20세기 예술의 거장인 보이즈와 케이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백남준은 어떤 예술가가 되었을 것인지를 쉽게 점치기 어려울만큼, 그들은 결정적 인간관계와 함께 상호 영향을 미쳤다. 백남준은 평소 케이지를 스승이라 불렀고, 보이즈에 대해서는 항상 ‘그놈’ ‘저놈’ 하며 애정 어린 호칭을 사용하였다. 게다가 백남준은 이들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두 거장을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에 적극적으로 결부시킴으로써 예술적 위치를 동등화시켰다.

두 거장들이 모두 역사 속의 인물로 사라진 지금, 백남준은 67세의 나이로 홀로 남아 그 역시 뇌졸중에 의한 신체적 불구와 싸우고 있다. 백남준을 따라다니는 화려한 호칭인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예술의 아버지, 작곡가, 행위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 등의 명칭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격렬하였던 저항정신과참여,소통의 예술도 이제 서서히 역사화 되어가고 있다. 위대한 예술이나 예술가도 세월 앞에선속수무책이라는사실을실감시켜준다.

우리는 백남준 예술이 갖는 세계성과 한국성을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아직도 우리가 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혈통주의적 관점도 작용하지만 그보다는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라는 통일된 관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백남준의 삶과 예술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어느 일부분이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또는 결정적인 부분이 제외된 채 불균형을 이루어왔다. 그 이유로는 첫째, 백남준이 한국에 알려진 시기가 80년대였던 까닭에 그의 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60∼70년대의 격렬한 저항적 아방가르드운동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둘째는 하이테크를 중심으로 하는 멀티미디어예술에 대한 우리 예술계의 이해부족과 협소한 경험으로 인하여 테크놀로지가 생산해내는 예술형식을 체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백남준의 코믹한 행색이나 매너, 해학성, 해프닝요소 등이, 예술은 철저하게 진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가벼워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백남준 예술이 한국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쟁점이기도 하다.

백남준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이나 외국에서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매우 늦은 편이다. 그가 ‘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려질 만큼 외국에서 반골의 예술정신을 실천하고 있던 60∼70년대에 한국에서는 백남준이라는 이름조차 변변하게 거론된 적이 없다. 단지 78년에 잡지 신동아가 그에 대한 짤막한 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화가이며 서울대 교수인 윤명로가 세계의 1백대 예술가 속에 백남준을 넣어 조명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글을 실은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백남준은 8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외국에서 역수입한 한국산인 셈이다.

84년 정초, 백남준은 텔레비전에 방영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이름을 소개한 뒤, 곧바로 “예술은 사기다” 라는 말과 함께 한국에 입성하였다. 그 해 1월, 한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가의 텔레비전에 방영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인공위성 비디오프로그램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고국을 떠난 지 34년만에 금의환향하였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그의 소설 ‘1984년’에서 오늘날 가공할 능력을 지닌 매스미디어가 드디어 84년에 인간을 정보의 노예로 만들고 정복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았다. 백남준은 이에 대하여 매스미디어가 인간을 정복한다기 보다는 인간과 인간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정보와 소통의 수단임을 알린 뒤, 오웰에게 세상과 우리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84년 새해인사를 건넨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백남준의 당시 입국성명서가 되어버린, ‘예술은 사기’라는 선언은 한국예술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이따금 회자되는 백남준 식의 명언이다. 예술을 대중적 이해와 소통, 해학, 유희, 참여에 바탕을 두고 한마당의 축제에 비교하려는 백남준 식 예술철학에서는 매우 유효한 담론인 것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문화계의 제도권, 비 제도권의 구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예술의 사회적 생산과 순수예술창작 사이의 논쟁, 서구문화에 대한 편향성의 문제가 자성과 반성의 시각으로 나타나고 있던 당시로는 그의 반어법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기였다.

앞으로 자주 거론되겠지만 백남준이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한 철학에 가깝다. 이는 그가 ‘플럭서스 예술운동’에 가담해 있던 60년대 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중심적 문맥이며 일종의 매너이다.

즉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끌기와 도발적인 제스처 등이 플럭서스의 철학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기란 따라서 미학적 애교이면서 옛것과 새것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교묘하고도 중보적인 메타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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