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한복에 미소를 짓고 서 계신 영정 속의 모습은 금방 우리에게로 다정히 웃으시며 말을 걸어오시는 듯한데, 영영 가시고 안 계시다니, 그리움이 사무쳐 온다. 쓰러지신 그날 아침, 선생님은 여성부가 마련한 정책자문회의에 참석하셔서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회의 초두에 제일 먼저 발언을 하셨다. 평소처럼 차분하고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이번 지방자치제 경선에서 여성들이 대거 탈락한 일을 몹시도 안타까워하시면서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시급히 만들어야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우정 선생님은 키도 몸집도 작은 분이셨지만, 실은 그분이 우리들 가운데 계시면 방이 그득해지고 모두의 마음이 든든해지게 하는 그런 큰 분이셨다. 그는 70년대 이래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선배이자 동지이면서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이기도 했다. 팔십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자신의 핏줄을 이은 자식은 없지만 우리 모두가 선생님의 자식이었다.
나는 수십 년 선생님을 지켜보았지만 한번도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서두르지 않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하여 설득하고 대화로 풀어나가셨다.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감도는 분이셨으나 정의로운 일을 위한 열정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닌 분이셨다.
70, 80년대 민주화운동 시대에 그 혹독한 탄압의 세월 속에서도 선생님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회피한 적이 없으셨다. 사람들은 직장과 가족을 이유로 궂은 일, 위험한 일을 피하곤 했지만 선생님은 남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셨고 항상 위험한 일을 자진해 떠맡으셨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 바로 이우정 선생님이셨다. 당시 그는 이미 강단에서 내쫓긴 해직 교수의 몸이었다.
또한 선생님은 가장 어려운 여건 속에 있을 때일수록 항상 새로운 일을 만드는 분이셨다. 1987년에는 ‘여성단체연합’을 후배들과 함께 만들어 이 땅에 진보적인 여성운동의 기치를 들었으며 1991년에는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통해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여성교류의 역사적인 물꼬를 텄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와 국회여성특별위원회를 처음 만들어 어려운 여건에서 선각자의 소임을 다하면서 여신학자이자 교회 여성지도자로서 한국 교회여성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진력하셨다.
무엇보다도 이우정 선생님은 소외계층, 그 중에서도 여성의 편이셨다. 여성노동자, 탄압현장에는 빠짐없이 그가 거기 있었다.여성 농민, 여성 장애인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는 절제와 청빈을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린 분이었다. 예컨대 14대 국회의원 시절 의원평균 재산이 14억원대였던 당시 그의 재산 등록액은 1300만원이었다. 집이 없어 조카네 집에 살고 있었던 그에게 어느 시민이 “청빈한 삶에 감동 받았다”며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한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곧은길을 걸으며 그는 우리의 등불이 되고 위로자가 되어 주셨다. 그를 잃은 슬픔이 이다지도 절절하고 그가 떠난 빈자리가 이토록 허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 “나는 사흘만 아프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예언이나 하신 듯 꼭 그렇게 되었다. 언니처럼, 어머니처럼 나를 사랑해 주셨고 동지로서 끔찍이 신뢰해 주셨던 그 분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큰 아픔 없이 곱게 가신 것이 복되다 여기며 위로로 삼는다.
일찍이 안구를 기증해 두셨으니, 그 ‘선량한 눈’을 받아 가지게 된 사람의 눈이 되어 우리들과 세상을 따뜻이 지켜보아 주시리라.
한명숙 여성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