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함께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던 신씨는 통일문제에 관한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런 그도 서울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수상식에선 “57년간 조국통일운동을 일관되게 수행했지만 부족함이 너무 많아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신 명예회장의 일생은 파란만장하다. 190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돼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매만 맞고 풀려 나왔다. 충주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다 마카오로 망명해 중경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광복 이후 그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단독정부 수립안에 반대해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한 북행길에 한국독립당 당수였던 김구 선생과 동행,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일성(金日成)과 남북 연석회의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25분간 단독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남북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한독당이 강제로 해체되자 신 명예회장은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과 진보당을 창설했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이 간첩 혐의로 몰려 사형당하면서 그 또한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통행금지법과도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통일정책을 독점해온 정부보다 먼저 통일운동을 벌이면 죄가 되는 상황을 빗댄 얘기였다. 신 명예회장은 지난해 6월 금강산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53년만에 북녘 땅을 다시 밟는 감격을 누렸다.
그는 수상 식장에서 남은 여생도 통일운동에 헌신하겠다는 결의를 거듭 밝혔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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