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92년 겨울이었을 게다. 서울 광화문의 어느 건물 추운 강당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정기총회가 열렸다. 어쩌다 그곳에 그들 모두가 모여들었는지, 그러다 어떻게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로 심연 속으로 사라져간 것인지 돌이켜 보면 기가 막히고 마음이 저리다.
남민전의 전사 김남주 시인이 자신은 고자라서 연애도 못 한다고 의뭉스럽게 농을 한다. 스물네 살의 철모르쟁이인 나는 정말이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밀양에서 상경한 이재금 시인이 두툼한 ‘밀양문학’지를 안겨주며 소외된 지역문학의 현실을 개탄한다. 나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춘천에서 온 소설가 권도옥 언니의 새빨간 코트가 눈부시다. 언니는 누군가를 붙잡고 뭔가 자꾸 이야기하려 애쓰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다 뒤풀이 자리에 늦게 도착한 평론가 이성욱 형은 타인의 비밀은 아무래도 버겁다고 쓸쓸한 낯빛을 띤다.
지금은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 없다. 병으로, 혹은 스스로 세상을 등져 아까운 나이에 할 말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떠났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도 힘든, 권도옥 언니가 사인해 보내준 소설집 제목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였다. 아직도 나는 문학 속의 불멸을 꿈꾸었던 그들을 기억한다. 추억 속에서, 그들은 영원한 청춘인 동시에 나의 애틋한 동업자들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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