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부터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을 맡았던 이대공(李大公) 포스코 교육재단 이사장은 TJ가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분야의 인재는 직접 육성했고, 그렇지 않은 분야는 그 분야의 톱을 100% 검증한 뒤 모셔다 썼다”고 말했다.
94년 불의의 사고로 작고한 김호길(金浩吉) 포항공대 초대학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TJ는 85년 포항공대를 한국의 MIT로 키워줄 인물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재미과학자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 총장 얘기를 들었다. 이대공 이사장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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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총장을 모셔다가 포철을 직접 보여드리라고 하더군요. 김 총장이 포철을 한바퀴 둘러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더군요. 우리가 현장을 도는 동안 TJ는 워키토키로 계속 ‘총장님 표정이 어떠냐’며 체크를 했어요. 그날 저녁 TJ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김 총장에게 저녁을 대접했는데 마음속으론 이미 낙점을 했더군요.”
그는 지도자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원 교육임을 강조했다. 언제나 “물고기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강조했고 자신도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한 포철 OB는 “TJ는 ‘이 일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와 배경을 설명하고 결과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열심히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그래서 많은 포철 OB들은 “그를 믿고 따라가다 보면 20년 뒤에는 뭔가가 돼 있었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포철의 ‘TJ 사단’ 출신들을 보면 대부분 20∼30년 앞을 내다보고 각자의 적성에 맞춰서 길러진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69년 공채 1기로 입사한 이구택(李龜澤) 현 포스코 회장의 경우 일찌감치 사장감으로 점찍어 기술과 영업의 양 수레바퀴를 모두 굴릴 수 있도록 키웠다. TJ의 회고다.
“몇 가지 일을 시켜보니 입사 동기들 중 제일 나았어. 한눈에 사장 재목이라고 봤지. 그래서 휴스턴 지사에 내보내 6년간 영어를 익히게 했고 수출시장을 파악하도록 했어. 그 후 수출 판매부장을 거쳐 제철소장을 시켰는데, 이런 코스를 밟게 한 것은 모름지기 사장감은 밖에서(시장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지.”
황경로(黃慶老) 전 포스코 회장도 비슷했다. 그는 육군경리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는데 TJ는 그가 관리계통과 생산에 모두 정통하도록 이끌어주었다. 이대공 이사장은 TJ가 가장 중시한 교육 홍보 인사 분야에 주로 기용됐다. 박득표(朴得杓) 현 포스코건설 회장도 일찍 평가를 받았다. TJ는 부산상고 출신인 그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결코 꿈을 잃지 않는 머리가 매우 명석한 젊은이였다”고 회고했다.
TJ가 이들 인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아마도 능력이었을 것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빠른 두뇌회전과 분석력 등이 동기들보다 나아 TJ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였을까. 포스코의 한 OB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능력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명감이랄까 애국심이랄까, 한마디로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들을 TJ는 골라 썼습니다.”
TJ의 25년 포철 신화는 93년 그가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의 정치적 불화를 겪으면서 끝났다. 포철에서 그는 숱한 인사를 했다. 잘된 인사도, 잘못된 인사도 있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점짜리 인사란 없다고 본다면 그의 인재감별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만은 않을 듯싶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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