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불교 영화, 잘못 다루면 “진부하다”는 얘기를 듣기 쉬운 모성애라는 주제…. 어딜 봐도 요즘 충무로 정서와는 맞지 않는 영화 ‘동승’으로 개봉(11일) 열흘 만에 25만 관객을 끌어 모은 것.
배급을 맡은 청어람은 뜻밖의 흥행 호조에 개봉 첫 주 108개(우연의 일치로 염주 수와 같다)의 스크린 숫자를 둘째 주에도 100개 안팎으로 유지했다.
그뿐인가. 그가 기획, 시나리오, 감독, 제작을 맡은 이 영화의 순제작비는 8억원, 마케팅비를 포함하면 10억원이다. 요즘 충무로 영화 평균 제작비의 3분의 1도 안되는 액수다.
“제작비는 해외시장에서 이미 다 뽑았어요. 최소 150만달러(약 18억원)는 될 겁니다. 아무도 거들떠봐 주지 않았던 TV와 비디오 판권계약까지 합쳐 돈버는 일만 남았죠.”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고임표 편집실에서 만난 주 감독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기획에서 제작, 개봉에 이르기까지 무려 8년을 그는 ‘동승’에 바쳤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한 편의 영화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95년 ‘동승’을 기획했으나 마땅한 제작자를 만나기 어려웠다. 91년 이미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부활의 노래’를 제작한 그였지만 흥행 전망이 불투명한 영화에 선뜻 투자할 제작자는 없었다.
97년 모 건설사가 제작비를 대겠다고 나섰지만 곧 부도가 나면서 사무실과 촬영 장비를 빌리는데 들어간 돈까지 떼였다. 아버지의 집을 저당 잡혀 마련한 돈이었다. 이어 외환위기가 닥쳤고 살인적인 이자율에 결국 98년 집을 처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이 영화는 운명이었고 어머니였다. 94년 말기 위암 판정을 받고 95년 세상을 뜬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서라도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어머닌 병원에서 두 달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1년 6개월을 버티셨죠. 저는 그 사이 한국만의 독특함을 담은 영화에 대한 국제적 수요가 크다는 것을 배웠어요. ‘동승’은 불교, 모성애, 아름다운 사계 같은 가장 한국적인 원형을 담고 있어요.”
99년 8월 아내가 전세금으로 마련한 4000만원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 무작정 촬영을 시작했다. 1주일간 여름 장면을 찍고 두 달 뒤 가을 장면을 찍기로 했다. 숙박비를 낼 형편도 안돼 조감독을 인질로 남겨두고 하산했다. 1주일간 인질생활을 하던 조감독은 결국 스스로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그때 그 조감독이 다음달 개봉을 앞둔 ‘별’의 장형익 감독이다.
‘두 달 뒤’라는 약속은 결국 1년을 넘겼다. 99년 영화진흥공사가 판권을 담보로 1억50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자해줬다. 10월 가을 분량을 일주일간 찍고 겨울장면을 위해 ‘일주일 뒤에 보자’며 하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은 제작비를 맡겨뒀던 선배가 돈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쯤 되니까 이 영화는 마흔을 훌쩍 넘긴 남자의 실존의 문제고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로 다가섰습니다. 이 영화 하나 없다고 한국 영화계가 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내 인생은 뭐가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2000년 1월 강원도 지역에 수십 년 만의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그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날 하루 수백통의 전화를 걸어 간신히 촬영비를 마련했다. 이 돈으로 강원도 오대산 입구에서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다.
덕분에 당초 극중 51일간의 이야기는 3년까지 늘어났다. 머리를 일곱 차례나 깎아야 했다는 ‘동승’역의 김태진은 초등학교 4학년에서 중학생이 됐다. 미혼이었던 여배우 김예령은 결혼하고 애까지 낳아 진짜 어머니가 됐다.
그는 ‘동승’을 들고 해외로 뛰었다. 2월 베를린영화제까지 30여 곳의 해외영화제에 참가해 ‘동승’을 선보였다. 국내에선 쉽게 눈길을 끌지 못할 터이니 밖에서 성공시켜 안으로 가지고 오자는 속셈이었는데 들어맞았다. 외곽을 때린 탁월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사업가적 기질 덕을 보았다”며 웃었다.
국내에서도 ‘동승’ 알리기에 최선을 다했다. 제작 중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맺은 불교계와의 인연을 총동원했고, 명동성당에서 시사회도 가짐으로써 종교계의 관심을 끌어냈다. 법장 스님, 이해인 수녀, 조용직 목사도 모두 ‘동승’의 후원자로 모셨다.
“관객이 제일 고맙죠. 못 보여줄 것을 보여주거나 욕설과 억지웃음을 파는 영화가 아니더라도 극장을 찾는 관객이 있음을 증명해줬으니까요.”
불혹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그는 친지들에게는 가산을 탕진한 장남, 전세금마저 들어먹은 남편, 만날 때마다 돈타령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다.
‘동승’이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한 점의 작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스럽기 때문이다.
▼주경중 감독은 ▼
―1959년 전남 순천 출생. 여수 율촌중-순천고
―1984년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 입학. 영화연구회 ‘울림’창립. ‘울림’은 김태균(‘화산고’ 감독), 문승욱(‘나비’ 감독), 장형익(‘별’ 감독), 김대우(‘정사’의 작 가) 박정우(‘주유소습격사건’의 작가) 등을 배출
―1989년 새빛영화제작소 대표
―1991년 광주항쟁 소재의 영화'부활의 노래’(감독 이정국) 제작
―1995년 호주 국립영화제작소
(FAC) 객원감독. 어머니 사망
―1997년 ‘동승’의 제작자로 나선 건설사 부도로 초기 투자비를 모두 날림
―1998년 제작비 마련을 위해 담보로 잡혔던 아버지 집 경매에 넘어감
―1999년 첫 촬영에 들어갔으나 제작비 부족으로 일주일 만에 중단
―2000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제작비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았으나 1주일간 촬영 후 제작비 분실
―2001년 1월 수년만의 폭설이 쏟아지자 이를 찍기 위해 제작비를 융통, 촬영 재개. 40여명의 친구들로부터 반강제로 수십만∼수천만원 빌려 나머지 분량 촬영
―2002년 4월 ‘동승’ 완성(제작, 기획, 감독, 시나리오). 이후 1년간 30여곳의 해외영화제 순회. 상하이영화제 최우수각본상, 시카고영화제 관객상 수상
―2003년 4월 ‘동승’ 개봉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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