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2권의 책을 밤새워 읽은 뒤 특별히 어떤 감동을 받았다거나 교훈을 얻었다거나 하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학과 너구리 이야기가 있었고, 분수대에 빠진 인형 이야기가 있었고…. 삽화가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시던 모습은 뚜렷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물으신 것은 ‘다 읽었니?’라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가끔 그렇게 책을 사 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휴일이면 집에서 토끼도 그려 주시고, “진짜 토끼가 아냐”라고 하면 그림 토끼는 스케치북에 산다고 하시며 그 토끼가 들어갈 스케치북도 같이 그려 주실 정도로 자상하시면서도 말씀은 많지 않으셨다. 특히 초등학교 때 매일 등굣길에 찻길을 건너 주시기 위해 손잡고 가는 길에, 전날 눈을 흘겨준 친구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딸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시거나, 그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라고 하셨다. 조목조목 따지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라고 하면, “그게 그런 게 아니야”하며 엄하게 말씀하시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그런 답들이 항상 불만족스럽고 답답했다. 그러나 이제는 갑자기 화가 나는 상황이 되면 아버지의 그 ‘기다려 봐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하시는 말씀이 불쑥불쑥 떠올라 후회할 수도 있는 순간에 다시 한번 숨을 고르게 된다. 누구나 다른 템포로, 그리고 다른 고민과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남이 나와 같지 않다는 답답함을 이야기함에 앞서 그냥 조용히 내 일을 하는 것.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세상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