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양육시설 향림원의 최병운(崔炳云·72) 원장은 이곳에 거주하는 73명의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향림원 창립 이후 50년 동안 그가 보듬고 키워낸 ‘자식’들만 어림잡아 1000명에 이른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창립 50주년 기념일이었다. 이곳 출신과 후원자 등 멀리서 찾아올 손님들에게 선보일 율동과 연극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향기로운 숲의 마을(香林院)’이라는 이름이 과장이 아닌, 따뜻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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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원이 세워진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일. 최 원장의 선대인이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을 모아 1만여평 남짓한 자신의 과수원에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학도병이었던 최 원장이 아버지의 권유로 이 일에 뛰어든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강산이 5번 바뀔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데만 전념한 셈이다.
“22세에 일을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나를 형이라고 불렀어요. 내가 30대를 넘어가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더군요. 요즘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더 많아요. 나이를 먹으니 호칭도 바뀐다니까, 허허.”
향림원이 처음부터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공간은 아니었다. 가난했던 50, 60년대 아이들은 차라리 거지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애들이 영양실조 때문에 콧물을 많이 흘렸어요. 다들 코 밑이 항상 시뻘겋게 헐어 있었다니까. 머리에까지 생기는 피부병에다 온몸에는 부스럼이 나고…. 누더기 옷도 자주 해져서 밤마다 옷을 기워주는 게 일이었어요. 아, 정말 힘들었어요.”
당시 최 원장의 임무는 이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미국 선교회와 구호단체 등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끌어내는 것. 급증하는 전쟁고아를 보살피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했다. 경제상황이 좋아진 70년대 이전까지는 정부의 지원도 부족했다.
“연탄을 때던 시절 애들이 가스중독이라도 될까봐 우리 내외가 밤새 교대로 군불을 관리하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가 건강하게 자라줬죠. 애들 때문에 항상 긴장해 있다 보니 늙지도 않아요.”
그는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사는 시대가 오면 향림원을 찾는 아이들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 핏줄 하나 없는 고아는 거의 없어졌지만 대신 결손가정이나 가정 해체로 가정을 잃은 아이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이혼으로 인한 경우가 가장 많고 결손가정이나 장애인 부모 등 부양능력이 부재한 경우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향림원의 건물은 식당과 강당 등을 합쳐 모두 9개동. 한 방에 보통 4명이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최 원장 내외는 이곳에 살면서 수시로 아이들과 대화하고 이들의 생활환경을 점검한다. 최근에는 폭우로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마당의 흙을 걷어내느라 한동안 고생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정작 자신의 4남매는 대전의 친가에 따로 맡겨 키웠다.
“친자식에게 떡 하나라도 더 주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차별받는 상황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기를 펴고 살겠습니까. 애들 돌보느라 내 자식에게는 신경을 못 썼는데 일기장에 ‘나쁜 엄마 아빠’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어요.”
운영자들의 이런 배려 덕분에 향림원은 원생의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좋단다. 아이들이 깨끗하고 정돈된 향림원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때로 이들을 데려와서 함께 자는 경우도 있다.
아동양육시설은 반드시 그 지역의 중류층 이상의 환경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래야 애들이 위축되지 않고 소외감도 안 느낀다는 것.물론 불행한 가정환경 탓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진아도 없지 않다. 그래도 대부분은 열심히 배우고 앞길을 준비하며 학교에서 수시로 상장도 타온다고 한다.
최 원장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또 한 가지는 ‘향림민속예술단’이라고 이름 붙인 농악팀. 최 원장이 “최소한 특기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며 전문 강사를 불러 아이들에게 농악을 가르쳐 만들었다. 이 농악팀은 이제 금산군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초청이 쇄도하는 인기 그룹이 됐다.
보람도 남다르다. “사회로 나간 아이들이 명절이나 휴일 때는 열댓명씩 꼬박꼬박 찾아와요. 자기 차 몰고 선물꾸러미 들고 와서 큰절하는 거 보면 ‘아 이거구나’ 싶어요. 오줌싸개였던 ○○도 간판가게를 하면서 최근에 결혼해서 잘 살지.”
자식들이 결혼할 때는 돼지 잡아서 피로연 준비도 해주고 예식장에서 손도 잡아준다는 최 원장. 그는 “50주년 행사가 곧 시작된다”며 할아버지를 찾는 아이들의 귀 따가운 외침에 설레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최병운 원장은 ▼
-1931년 대전 출생
-1950년 대전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군 입대
-1953년 선친 고 최윤식씨, 대전 유성구 구암동에 보육원 설립
-1954년 재단법인 향림원으로 설립 허가. 최병운 원장 대표직 승계
-1964년 경북대 국문학과 졸업
-1977년 사회복지법인으로 변경 허가
-1981년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로 향림원 이전 개원
-1983년 향림원, 시범 영농육아원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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