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노동문제 관심쏟은 법학도 시절
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보며 걸어 온 두 가지 길이 있다. 그중 하나는 법조인의 길이었다. 초등학교 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어느 판사에 관한 글을 읽은 후부터 꿈꾸게 된 이 길은 그에게 사회의 약자를 위해 ‘정의’를 실천하는 길을 의미했다.
또 하나의 길은 불교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갔던 청계산 청계사에서 처음 ‘자비(慈悲)’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비는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큰 ‘환희심(歡喜心)’을 느꼈고, 학교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불교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대학교 때는 서울 봉은사의 ‘대학생 구도회’ 회원으로 불교수행을 하면서 불교의 세계를 깊이 맛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이 지도법사로 돌봐 주었고 1년에 한 번씩은 성철 스님을 찾아뵙고 부처님께 3000배를 드리며 한 달 동안 함께 수행했다. 이 무렵 그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은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광덕 스님이었다. 광덕 스님은 ‘화엄경’에 나오는 보현행원(普賢行願)의 가르침을 통해 보살의 실천행과 불교의 자비구세(慈悲救世) 정신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가 불교를 통해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계의 ‘상호관련성’이었다. 불교의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은 각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와 서로 의존하며 서로 도와주는 상의상생(相依相生)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법조인의 꿈을 가졌던 그는 1966년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뒷날 이른바 ‘불온 서클’로 낙인찍혀 사라지게 되는 ‘사회법학회’에 참여했고 고 조영래 변호사, 장기표 사민당 대표 등과 함께 사회문제와 노동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등의 사회주의를 공부하면서 공동체 문제를 고민했던 것도 이 시절이었다.
● 애덤 스미스-J.S.밀-하이에크의 영향
교수는 자신을 ‘공동체적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얼핏 보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념이 결합된 그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중시하되 공동체적 질서와 연대성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타자와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하는 불교의 영향은 이런 두 개념의 미묘한 결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박 교수는 “시장경제를 우선시 하되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창의도 무제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경쟁이라는 공동체적 질서와 약자보호라는 공동체적 연대 안에서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이런 입장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로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 세 사람의 학자를 든다.
도덕질서, 경제질서, 법질서라는 세 가지 사회발전 원리를 인간 본성에서 찾으려 했던 사람이 바로 18세기의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인성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경제정책과 입법의 원칙을 밝혔고, 하이에크는 이 방법론을 20세기의 현실에서 재현하려 했다. 20세기 초 빈부격차, 노동소외의 심화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며 국가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할 때 하이에크는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의 중요성을, 그리고 사회주의 몰락의 필연성을 외롭게 역설했다.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은 한마디로 균형과 중용(中庸)의 사상가였다. 그는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와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비교해서는 안 된다”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을 그 이상과 현실의 관점에서 공정하게 볼 것을 주장했다.
● 공정한 법집행 투명한 제도 중요성 역설
조인이 되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법대에 들어갔지만, 1960년대 한국 현실에서 박 교수가 목격한 것은 ‘법과 제도보다는 가난 때문에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실’이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사법시험을 포기한다. 그 대신 경제발전론에 관심을 가지고 경제학 강의를 들으며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사회법학회’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경제발전의 목적은 그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물질적 풍요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관심은 자연 노동경제학으로 이어졌다.
1975년 일본 도쿄대에서 노동경제와 사회정책을 공부했고, 1980년에는 미국 코넬대에서 경제발전론과 노동경제학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 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수석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국가 주도로 경제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 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 운영 패러다임이 앞으로는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갈 때까지는 경제적 발전을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갈 때는 법과 제도의 성장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사회구조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법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법과 제도가 공정하고 투명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면서 그의 학문적 관심은 노동경제학에서 법경제학으로 이동하게 된다.
법경제학의 모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이었다. 법경제학은 법학과 경제학의 결합이었지만 더 나아가면 그것은 법학과 경제학과 윤리학이 결합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5년 서울대 법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법경제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 교수시절 ‘세계화’ 연구활동… YS정부 참여
교수는 1989년 집에 찾아온 친구 서경석 목사와 이야기하다가 함께 사회운동에 관한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다. 비판에는 강했지만 대안 제시에는 취약했던 당시의 사회운동을 탈피해 체제 내에서 실질적인 정책대안을 찾는 시민운동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 강철규씨(현 공정거래위원장) 등과 함께 학자들을 모으고 서 목사는 시민운동가들을 모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1991년 로버트 라이히 교수(당시 하버드대)의 ‘국가의 임무(The Work of Nations)’를 읽으며 당시 전 세계 정치 경제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세계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93년에는 서울대 교수들과 세계화연구회를 만들었다.
활발하게 학문적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던 그는 1994년 말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의 장래를 위한 장기 정책수립을 맡아 달라는 요구를 받고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교육개혁과 사법개혁을 비롯해 복지 노동 재벌 등 각 분야의 개혁을 주도한다. 나름의 성과도 많았지만 현실정치의 벽도 절감해야 했다.
1998년 김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청와대에서 물러난 그는 이이의 ‘율곡전서’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들고 속세를 떠날 생각으로 산으로 들어갔다. 국정운영을 경험한 후 특히 이이의 글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임금에게 국가개조의 개혁정책을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자 좌절하고 분노해 사표를 던지고 낙향했다가도,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해 다시 조정으로 올라가 개혁정책을 건의하는 노력을 반복하다가 49세에 세상을 떠난 이이의 삶은 그에게 무척 감동적이었다. 박 교수는 “이이의 식견과 애국심을 보고 나의 부족함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로 갔다. 그동안의 실무 경험을 정리하고 이것을 학문과 결합시키기 위해서였다. 박 교수는 “우리의 현실적 이슈를 다루고 고민하는 학문이 되지 않으면 학문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나 국가 정책 대학원 설립을 통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개혁적 정책세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학문은 왜 하는가? ▼
“학문을 왜 하는가? 사회적 실천을 위해서다. 종교적 깨달음에는 도덕적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하듯이 학문을 통한 진리의 추구에는 반드시 사회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도덕적 실천이 따르지 않는 종교적 깨달음이 공허하듯이 사회적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진리의 추구는 맹목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문을 통해 사회적 병을 진단하여 그 원인을 밝히고 그에 대한 처방을 마련한 후에는 반드시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적 병을 고치는 데 나서야 한다.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책무이다. 그것이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나 먹고 살아 온 밥값을 하는 것이 된다. 농민들이 땀을 흘릴 때 자신은 편히 책을 읽었다면, 자신이 배우고 익힌 바를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에 회향(回向)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법경제학’ 개정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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