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는 그에게 좋은 구실이자 처방이었다. 이 생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며 진짜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있다는 초월의식은 자신의 내부에서 날카롭게 마주 서 있던 모든 것들을 무화(無化)시켰다. 이 세상 모든 것의 구분이 이미 없는데 하물며 예술과 인생이랴. 자신이 공중 분해될 지경에 이르러 그는 ‘허무’와 ‘초월’에 의탁하면서 가까스로 스스로를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사랑이 시작되었다. 애당초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분법은 실패했고 1986년 10월 결혼했다.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제 아내와 아이까지 딸렸으니, 다시는 비상(飛上)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덮쳐왔다.
|
대학원 졸업 후 얻은 첫 직장인 서울화랑에서의 큐레이터 생활도 편치 못했다. 화가가 아니라 이론가로 대접받으면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예술과 비즈니스 사이의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는 그의 여린 내면을 할퀴어댔다.
서울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젊고 유능한 청년의 절망을 바라보는 세간의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인 경북 상주시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시골에 내려와 처음 일년은 무작정 일만 했다. 돌담을 쌓고 웅덩이를 쳐내고 나무를 심고 무너진 굴뚝을 세웠다. 달 좋은 밤엔 늦도록 마당을 서성였으며 눈발 날리는 저녁 무렵엔 오래도록 숲 속에 서 있곤 했다.
언제부턴가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그 느낌이 사라져 버렸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이제야말로 정착하게 된 것인가. 그 뒤로 그에게 삶은 희망이, 가족은 꿈이 되었다.
상주시 함창읍 하갈리 동성 분교. 10년 전 상주로 내려온 그가 98년 작업실이 수해에 쓸려가는 바람에 인근에서 얻어 쓰고 있는 폐교다.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 이곳에서 그를 만났다. 폐교라곤 하지만, 마룻바닥이며 칠판, 교실 문패 등은 그대로 남아 풍금소리에 맞춰 합창하는 아이들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아침마다 아내가 싸 주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교실 두 개는 작업실로, 한 개는 작은 목공소로 꾸몄다.
이곳에 와서 화풍이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검은색 바탕에 눈 덮인 산이나 나무를 물감으로 짓이기듯 표현했다. 지금은 화려한 색의 물감을 붓에 잔뜩 묻혀 화폭을 향해 뿌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늘의 별과 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그려낸다.
혜성을 보러 가기 위해, 잠자는 아내와 아이를 깨워 이른 새벽 산을 넘어 다니기도 했던 그는 붓을 뿌려 생긴 점들의 집적(集積)을 통해 별, 혜성, 은하계를 만들었다. 무수한 점들이 화면에 가닿아 별 무리가 되고 하늘과 우주가 된다. 그래서 그의 캔버스를 들여다보면 벌레 우는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요즘 몰두하는 바다 그림에서도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그의 영혼이 보인다. 별 그림과 마찬가지로 물감을 뿌려 만든 하나하나의 점들은 그대로 장엄한 풍경이다. 때로는 노을아래, 때론 아침 햇살 아래 펼쳐진 평온한 바다는 하늘과 하나 되어 신비한 황홀경을 만들어 낸다.
그의 집은 작업실에서 차로 20여분쯤 떨어져 있다. 60년 된 낡은 한옥은 부모님이 태어난 집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반 재래식 화장실과 좁은 부엌에도 불평 없이 사는 아내와 아이가 고맙다고 했다.
그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잊은 지 벌써 오래”라고 말한다. 더 이상 ‘합일(合一)’ 어쩌고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게 있다면, 좀더 자세히 풀꽃들을 들여다보고, 좀더 조심스럽게 매미 허물을 만지고, 좀더 오랫동안 거미줄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림도, 삶처럼 단순 간명하고, 그렇지만 강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상주에 사는 화가 오병욱은 그림을 ‘그리는(畵)’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살고(生)’ 있었다.
상주=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약력 ▼
△1959년 대구 출생
△1982년 서울대 회화과 졸업
△1988년 서울대 대학원 서양화과 미술이론전공
△1988∼90년 갤러리 서미 큐레이터
△1984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 93년과 96년 서울에서 두 차례 개인전. 2001년 대구에서 네 번째 개인전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